<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지워진 삶을 읽다
‘2018 창작산실 올해의신작’에 선정돼 올초 시범 공연을 선보인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가 정식 초연을 올렸다. 카프카의 유작 반환 소송 실화를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은 거장 작가의 원고를 놓고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과 70대 노파 호프가 30년간 벌인 재판을 그린다. <더뮤지컬>이 리뷰어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한 ‘더뮤지컬 리뷰어’ 5인이 <호프>를 관람하고 대화를 나눴다.
*익명성을 위해 참여자 이름은 뮤지컬 캐릭터명으로 기재했다.
마음을 울리는 말
스위니_ <호프>는 알앤디웍스의 전작들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더라. 이전에는 대개 음악과 쇼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호프>는 서사와 메시지가 강조돼서 놀랐어.
롤라_ 신인 창작진의 작품임에도 최근 본 어떤 창작뮤지컬보다 짜임새가 좋았어. 장면 연결이 매끄럽고 적재적소에 음악을 잘 사용했어. 또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사용됐는데도 전체적인 통일성이 있어. 가사도 음악과 상황에 잘 들어맞고.
스위니_ 기억에 남는 대사도 많아. 예를 들면 ‘약속을 지키는 게 얼마나 사람을 비겁하고 졸렬하고 더럽게 만드는지 너는 몰라’라든가. 마음에 확 꽂히는 통찰력 있는 문장을 만들 줄 아는 작가더라. 다만 결말부에 설득력이 약해지는 게 아쉬워. 원고를 인격화한 가상의 존재 K가 나서서 갑자기 모든 갈등을 해결하잖아. K가 ‘호프 넌 지금까지 이랬던 거고,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말하니까 평생 원고를 붙들고 살아온 노인이 갑자기 변한다? K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가?
나타샤_ 그럼에도 노래를 들으면 감정에 젖어 나도 모르게 설득되는 면이 있어. K는 호프의 상상이 만들어낸 존재고, K가 호프에게 하는 말은 결국 호프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잖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한 노인이 힘들었던 자기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는 거지. 그게 노래로 잘 전달이 돼서 뭉클하더라고.
롤라_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같은 대사나 가사가 각각 다른 상황에서 반복되어 쓰인다는 거야. 재관람을 하니까 그걸 알아차리게 되더라.
스위니_ 호프는 현재에 살지 못하고 기억 속을 맴돌며 사는 사람이잖아. 그걸 대사와 가사의 반복으로 잘 표현했어. 호프의 심리를 따라가려면 대사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해. 그래서인지 재관람을 하면서 이해하게 된 부분이 많았어. 나는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호프가 왜 원고를 팔고 새 인생을 살지 않는지 선뜻 이해가 안 됐거든. 그런데 재관람 때 K가 호프에게 하는 대사가 귀에 들어오더라. 혼자 살기 위해 많은 사람을 배신하고 도망친 자신과 원고에게 벌을 주기 위해 불행하게 사는 거라고. 그 말을 곱씹어 보니 이해가 갔어.
나타샤_ 대사로만 설명하지 말고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면 좋겠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라는 대사가 여러 번 나오는데, 사실 그게 호프에게 제일 필요한 말이잖아. 네 현재 일상을 돌보라는 거. 근데 그렇게 멋진 말을 왜 대사로 처리하고 끝낼까 아쉽더라고.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장면을 넣어주면 결말의 변화도 훨씬 납득이 가지 않을까?
무대 중심에 선 여성
롤라_ <호프>는 성차별을 논하거나 진취적인 여성을 내세운 작품은 아니지만,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놓고 그의 삶을 깊이 있고 공감 가게 다뤄. 뮤지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
스위니_ 이런 작품이 남성 캐릭터들 사이에 페미니즘을 의식한 여성 캐릭터 하나 끼워 넣은 여타 창작뮤지컬보다 훨씬 의미 있다고 봐. 물론 아쉬움도 있지. 뮤지컬에서 여성의 각성을 그릴 때 곧잘 드러나는 문제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만 있고 구체적인 지향점이 없다는 건데, 그건 호프도 마찬가지거든. 그리고 호프의 각성이 남성 캐릭터인 K의 주도로 일어난다는 점도 아쉬워. 물론 K는 호프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지만 그걸 연기하는 건 남자 배우니까.
롤라_ 공연을 보고 왜 K를 굳이 남자가 연기할까 궁금했어. 단순히 호프와의 시청각적 대비를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했지. 그런데 작가 왈 호프가 자신과 정반대의 존재를 열망한다고 생각해서 K를 젊고 매력적인 남자로 설정했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으니 설득이 되던데.
마틸다_ 호프가 열망하는 존재가 젊은 남자라는 건 너무 고정관념을 반영한 설정 아냐? 자기와 다른 매력적인 여자를 열망할 수도 있잖아.
스위니_ 나는 작가 의도와는 다르게 생각했어. 베르트에게 원고는 자기 친구인 남자 작가 요제프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고, 마리에게 원고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 베르트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잖아. 호프에게도 원고는 자기를 떠난 남자 카델과 연관된 존재이니, 자연스럽게 원고를 남자로 연상한 게 아닐까 싶었지.
마틸다_ 하지만 K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존재이고, 호프 내면의 목소리이니까 성별에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봐. 앙상블 역시 지금처럼 전부 남자여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알앤디웍스는 전작 <록키호러쇼>와 <더데빌>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한 바 있으니 <호프>도 재연에서는 그러길 바라. 호프의 엄마 마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난 마리가 베르트란 남자에게 목을 매서 미쳐가는 여자로 그려지는 게 불편했어.
나타샤_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봐. 목숨을 위협받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뭐라도 붙들어야만 희망을 갖고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스위니_ <호프>는 무언가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잖아. 베르트는 친구의 원고를, 마리는 사랑하는 베르트를, 호프는 엄마인 마리를 자신의 전부처럼 여기며 살고, 이 엇갈림이 비극을 초래해. 전체적인 인물 구도를 고려하면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어.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며
나타샤_ 잘 짜인 서사와 음악에 비해 무대화 방식은 많이 아쉬워. 무엇보다 계단형 무대를 세운 이유를 모르겠어. 재판정이나 도서관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지만, 이 작품에는 현재보다 과거 회상 장면이 더 많잖아. 비효율적인 세트야.
라피키_ 전쟁과 수용소 장면이 그 중요도에 비해 너무 가볍게 표현된 것도 아쉬워.
스위니_ 나는 무대 양옆의 나무가 제일 의아해. 희망의 상징인가?
롤라_ 글쎄,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표현하려고 한 걸까?
마틸다_ 어떤 심오한 상징을 심어놓았든 관객에게 전달돼야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롤라_ 과거와 현재 장면에 조명을 다르게 한 건 좋았어. 과거 회상 장면은 어둡게, 현재 재판 장면은 밝고 희망차게 표현했더라고.
스위니_ 군데군데 안무에 힘을 준 장면이 있는데 극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야. 블루라이트를 쓴 경매장 장면은 아무리 쇼스타퍼 장치라 해도 너무 튀더라.
라피키_ 집을 나간 호프가 방황하는 과정을 안무로 표현한 장면에서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긴 했어. 하지만 전반적인 무대화 방식이 작품과 어울리지 않은 느낌이야. 진정성 있는 작품인 만큼 연출 면에서 좀 더 모험을 해보면 좋겠어. 이를 테면 빈 무대를 쓴다거나 하는 식으로. 여러 가지 버전으로 공연하면서 다듬어 나가면 더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봐.
롤라_ 잘 다듬어서 10년, 20년 가는 작품이 되면 좋겠어. 나중에 김선영과 차지연이 나이가 들어 다시 이 역할을 맡는 걸 보고 싶어. 나이 든 배우가 연기하는 호프는 더 큰 울림이 있을 것 같아.
마틸다_ 굉장히 섬세하고 집중력 있는 연기가 필요한 작품인데, 너무 많은 배우가 멀티 캐스팅으로 출연하다 보니 배우별로 역할 소화력에 편차가 크고 서로 간의 호흡도 삐걱삐걱해서 안타까워. 재연은 이 작품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배우들과 함께하면 좋겠어.
스위니_ <호프>는 제목 그대로 창작뮤지컬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는 작품이었어. 다만 창작뮤지컬 중 많은 작품이 외적 갈등보다 내면 심리에 치중하는 경향은 우려가 돼. 호프가 이렇게 살게 된 데에는 분명 사회적인 원인도 있는데 결국은 개인의 정신 승리로 갈등이 해소되잖아.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힐링 담론은 경계해야 한다고 봐.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8호 2019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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