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항해
배우를 성향으로 나누자면, 두 부류다. 이런 사람이 아니면 누가 배우를 하나 싶을 만큼 끼를 타고 난 사람과, 저런 사람이 어떻게 배우를 하는 걸까 신기할 정도로 내성적인 사람. 지금 내 앞에 있는 박인배는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완전히 장난꾸러기였죠.” 어린 시절 박인배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외향적인 아이였다는데, 그걸 말하는 모습은 그렇게 점잖을 수가 없다.
단어를 선택할 때의 신중함, 그리고 차분함을 넘어선 진중한 태도. 이건 일종의 연기인 걸까?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재의 모습은 환경의 변화가 낳은 결과물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연극이라는 걸 처음 배우면서 연기를 잘하려면 집중력이 강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전 너무 산만하고 시끄러웠죠. 깊이를 가지려면 집중력을 기르고 차분해져야겠다, 저를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지나치게 심각해진 나머지 종종 주위 분위기를 가라앉게 할 때도 있지만, 자신은 여전히 장난꾸러기 같은 면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영원히 어른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규범이 바로 서고, 사리 분별이 명확해진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있죠. 하지만 반대로 고집스러워지고, 편견이 강해지고… 뭐랄까 규정적인 측면이 강해지잖아요? 하지만 예술가의 사고는 유연해야 한다고 봐요. 그건 어린 아이의 사고에 더 가까운 거죠.” “배우는 예술가라고 생각해요?”라는 물음에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분명하게 말했다. “무대에 선 배우는 당연히 예술가죠. 자신이 관객을 만나고 모든 걸 책임져야 하니까.” 그럼 모든 무대 배우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걸까? “네. 다만 좋은 예술가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걸 판단하는 건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하고요.” 이번 대답엔 주저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좋은 연기는 무엇인지, 배우가 열심히 연기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언지, 또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와 같은 추상적인 질문으로 그를 괴롭혔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고민 끝에 그가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다. “좋은 연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빙성인 것 같아요. 그걸 만들기 위해 배우는 작품에서 진짜로 필요한 것,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해서 열심히 하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배우에게 필요한 매력은 직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인물을 창조할 것인가, 거기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해요. 하지만 무언가를 판단할 때 보통은 직감에 의존하게 되죠. 제 생각에 직감은 지금까지 경험의 결과물인 것 같아요. 어떤 책을 읽어 왔는지, 어떤 영화를 봐왔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왔는지 경험의 총합이죠.”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1박 2일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지만, 장래 희망에 ‘배우’를 써넣을 만큼 어려서부터 오매불망 배우가 되길 꿈꿔온 건 아니다. “배우가 된 데에 그럴듯한 계기는 없어요. 재미있는 걸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성우에서, 연극학도, 오페라 가수, 그리고 뮤지컬 배우로, 순간순간의 충동이 현재로 이끌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뮤지컬 무대에 서는 건 예상 못한 일이었다. “대학 때는 오로지 ‘연극, 연극!’만 외치고 다녔어요. 연극의 가치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뮤지컬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죠. 노래가 뭐랄까, 꼭 불순물처럼 느껴졌거든요.” 그의 생각을 바꿔 놓은 건, 다소 엉뚱하게도 수업 시간에 보게 된 한 편의 오페라였다. 작품의 제목은 <토스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노래를 부르지? 우와. 한마디로 멋있어 보였어요. 나도 저렇게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음에 레슨을 시작했죠. 처음엔 사람의 몸에서 저런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게 경탄스러웠는데, 제가 거기에 조금씩 다가가는 게 흥미롭더라고요. 그때 무대 위에서 부르는 노래의 가치가 연기의 가치에 비해 떨어지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그의 데뷔작은 가극 <세빌리아의 이발사>였다. 같은 기획사가 준비하던 작품이 뮤지컬 <찬스>였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뮤지컬 무대에 서게 됐다. 그리고 지난 2년 사이, 마니아층을 양성하며 반향을 일으켰던 <스팸어랏>과 <투란도>, 그리고 <셜록홈즈>에서 무게 있는 역을 맡아 삼연타를 치며 관객에게 자신을 알리는 중이다. “한 작품을 준비할 때 단계 단계마다의 어려움이 있어요. 작품을 분석할 때, 연습하는 과정에서, 또 무대에 설 때 그때그때 어려움을 이겨내야 해요. 그러한 노력이 박수로 돌아왔을 때 희열을 느껴요. 카타르시스죠.” 뮤지컬은 하면 할수록 흥미를 느끼는 장르라며 뮤지컬 배우로서 사명감을 갖게 됐다고 덧붙인다.
‘하고 싶은, 그리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이라는 기준을 가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차기작은 로맨틱 코미디 <쉬 러브즈 미>. 이번 무대에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까? 이제 시동이 걸린 그의 앞날엔 거침없이 내달릴 곧게 뻗은 길만 놓여 있을까? “전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편이에요. 설령 작품도 못하고 놀고 있다고 해도 누가 물으면 제 삶은 순탄하게 가고 있다고 말할 거예요”라고 느긋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그렇지 않다고 한들 어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믿음에 확신을 주는 말 하나 더. “‘인간은 패배에 익숙해져야 한다’ 체 게바라가 한 말이에요. 패배가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면 항상 충격에 빠지겠지만, 자주 패배해 보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승리를 분석할 수 있겠죠. 그게 강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더 많은 실패를 해봐야 하는 거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8호 2011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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