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 Live 10주년의 역사
영국 국립극장(이하 내셔널 시어터)에서 제작한 연극을 국내에서 영상으로 관람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 되었다. 국내 국립극장이 2014년 3월 <워 호스>를 시작으로 내셔널 시어터의 연극 실황 생중계 프로젝트인 NT Live 시리즈를 매년 레퍼토리 시즌 라인업에 포함시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프랑켄슈타인>과 <햄릿>, 국내에 라이선스 작품으로 먼저 소개된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등의 작품이 이런 형식으로 국내 관객과 만났다. 2018년부터는 해오름극장에서 달오름극장으로 상영 장소를 옮겨 객석 규모가 축소되면서 티켓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워지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이렇게 국립극장이라는 극장 공간에서 연간 레퍼토리 일정에 따라 상영되거나 가끔 이벤트성으로 영화관에서 볼 수 있지만, 본래 NT Live는 극장에 올 수 없는 관객들이 수준 높은 공연을 실황으로 즐길 수 있도록 위성을 통해 전 세계 영화관으로 실시간 생중계한다.
영화관에서 연극을 보다
2009년 6월 25일, 마음 한구석에 의문을 품은 관객들이 헬렌 미렌이 연기하는 <페드라>를 보기 위해 동네 영화관에 찾아들었다. 누군가는 2003년 이후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헬렌 미렌의 연기를 보기 위해, 누군가는 명성이 자자한 런던의 프로덕션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는 새롭게 등장한 ‘연극 생중계’라는 생경한 방식의 관극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영화관으로 갔을 것이다. 그렇게 영국 전역의 76개 상영관과 전 세계 200여 개 상영관에 5만여 명의 관객이 모였다. 런던의 극장에서만 공연했다면 결코 다다르기 어려운 규모였다. 전 세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작품 소개와 출연 배우 명단이 실린 낱장짜리 프로그램을 손에 쥐고, 커다란 영화관 스크린을 쳐다보며 같은 시간 극장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의 시작을 기다렸다.
공연 실황을 영화관에서 생중계한다는 개념은 2006년 12월 30일 뉴욕에서 시작됐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첫 출발 이후 지금까지 10년간 NT Live를 통해 80여 작품이 21개 무대에서 3,500개 상영관으로 중계되어 거의 900만 명에 달하는 관객과 만났다. 오늘날에는 때마다 영국 내 700개 상영관을 포함하여 65개국의 2,500개 상영관으로 중계될 만큼 10년간 거의 10배가량 규모가 커졌다. 영국과 유럽에서는 대체로 동시간에 중계되고, 북미와 호주는 시차에 따라 같은 날이나 며칠 내로 시간을 정해 후편집 없이 녹화된 그대로 상영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아시아 국가에는 따로 배급하고 있다.
NT Live의 성공 비법
내셔널 시어터는 우수한 작품을 제작해 최대한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그래서 퀄리티 높은 작품을 우선적으로 NT Live 상영작으로 선정한다. NT Live는 런던에 있는 내셔널 시어터까지 공연을 보러 오기 어려운 관객들의 공연 접근성을 높여주기 위해 공공기금을 지원받아 시작한 사업이었다. 초중고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연극을 교육 자료로 제공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다 전 세계에서 NT Live 작품의 인기가 높아지고 관객 수가 늘면서 안정적인 수익 모델이 됐다. 2017-2018 시즌에 NT Live의 디지털 수입은 640만 파운드(약 93억 원)로 내셔널 시어터 전체 수입의 6%를 차지한다. 이는 지원 없이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수준이며, 내셔널 시어터는 이 수치가 앞으로 더 올라갈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공연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는 배우와 관객에 의해 매일 다른 모습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 있는 관객이 그런 감각을 화면에 중계된 영상을 보며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지, 영화관에 앉아서 화면으로 보는 연극이 영화와 차별화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말들이 많았다. 사실 연극의 공간을 극장 밖으로 확장하는 시도는 NT Live 이전부터 있어 왔다. 국내에서도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공연 영상을 짤막하게 소개하거나, 때로는 전막 공연 실황을 상영하는 <문화가중계> 같은 프로그램이 있듯이 영국도 더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라디오나 TV를 통해 연극을 방송하고 아카이빙 해왔다. 다만 그런 프로그램들은 대체로 카메라가 무대를 잡는 데 급급해 시청자의 눈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NT Live의 시도가 독창적인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연극의 ‘라이브성’을 해치지 않고 섬세하게 전달하여 관객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유료 관극 경험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경험이 극장 객석에서 직접 무대 위의 연기를 보는 경험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유사하면서도 색다른 관극 경험을 선사하는 이벤트가 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NT Live는 대체로 영화관에서 중계된다. 영화관은 보통 어느 동네에나 있으니 누구나 접근하기 편리하고, 극장 공간과 다르지만 어쨌든 관객이 모여 어둠 속에서 공동의 관극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티켓 가격은 실제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보다는 저렴하지만 영화 티켓가보다는 높게 책정된다. 실제로 극장에 앉아 배우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영화관에서는 어느 자리에 앉아도 배우의 표정이 잘 보인다는 게 장점이다. 내 시야가 카메라의 시야에 의해 제한받는다는 게 아쉽지만 제작진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특히 카메라 앵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영화관으로 중계되는 NT Live를 위해 해당 작품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촬영 연출자가 따로 섭외된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중계할 땐 드라마에 강한 연출자를, 뮤지컬을 중계할 땐 음악에 강한 연출자를 섭외하는 식이다. 촬영은 철저하게 공연에 맞춰진다. 촬영을 위해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 연극이 공연되는 현재 상황을 최대한 잘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평소 공연 때와 다르게 배우들이 마이크를 차거나, 조명이 카메라에 잘 드러나도록 변화를 주긴 하지만, 그 외의 연기나 시선 등은 평소처럼 하도록 한다. 배우가 마음껏 연기를 하는 동안, 객석 곳곳에 배치한 5~8대의 카메라로 연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앵글을 잡아 전달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연출자의 지휘 아래에 2회가량 카메라 리허설을 거쳐 어느 장면에서 클로즈업, 와이드샷, 컷 전환을 할지 꼼꼼하게 정한다.
생중계 당일,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그날 공연이 중계된다는 사실과 발생 가능한 불편 상황에 대해 충분히 미리 알리고, 생방송 스튜디오처럼 최대한 관객을 방해하지 않도록 진행한다. 한편, 상영관에서는 중계 시작 전 짤막하게 창작진의 인사말이나 인터뷰 영상을 보게 된다. 그 후 카메라가 극장 객석의 관객들을 먼저 잡고, 서서히 무대 쪽으로 향한다. 상영관의 관객들이 지금, 이 순간 극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하는 앵글을 취한다. 객석에 불이 꺼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영화관에 있다는 것을 잊을 만큼 무대에 몰입하게 된다.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클로즈업을 통해 배우가 섬세하게 표현하는 감정을 볼 수 있게 하고, 때로는 <프랑켄슈타인>에서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앵글이나 회전하며 들어가는 앵글을 통해 극장 객석에 앉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생경한 시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이 되면 상영관의 관객들도 쉴 수 있게 잠시 화면이 아웃되고, 2막 시작까지 몇 분이 남았는지 알려주는 시계가 하단 구석에 나타난다. 5분가량 지나고 나면 창작진이나 배우의 짧은 인터뷰가 나오고 나서 카메라가 다시 객석을 비춘다. 몰입해서 끝까지 보고 나면 커튼콜 때 마치 실제 극장에 있는 것처럼 박수를 쳐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무대가 있는 극장과 전 세계 수백 개 상영관에서 동시에 관객들이 감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새삼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공연의 ‘라이브성’을 최대한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섬세한 카메라워크로 관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잡아주고 몰입이 깨지지 않도록 신경 쓰는 점이 NT Live의 성공 비법일지도 모른다.
쓸모없지만 재미있을지 모르는 사실들
NT Live 상영작에는 내셔널 시어터가 제작한 공연이 많지만, 다른 극장에서 중계한 작품도 많다. 웨스트엔드 극장에서 중계한 <스카이라잇>, 영빅 시어터 제작 공연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예르마>, 미국 브로드웨이에 가서 녹화해 온 <생쥐와 인간> 등이 그 작품들이다. 뮤지컬 <플리스>도 중계한 적이 있다. <워 호스> 촬영 때는 최초로 4K 기법을 도입했다. 단일 공연으로 가장 많은 관객 수를 동원한 기록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햄릿>이 보유하고 있으며, 2015년 당시 25개국 1,400개 상영관에서 225,000명이 관람했다. 스웨덴과 러시아에서는 실시간으로 자막을 송출하기까지 했다. 현재까지 누적 관객 수는 1백만 명에 육박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조니 리 밀러, ‘투 셜록’은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과 크리처를 번갈아 연기했고, 그 두 버전이 일주일 간격으로 중계됐다. 이 작품은 상당히 자주 앙코르 상영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앙코르 상영은 인기가 많은 작품에 한해 이벤트성으로 진행되는데, 톰 히들스턴의 <코리올라누스>와 마크 스트롱의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헬렌 미렌의 <오디언스>도 단골 상영작이다. NT Live는 작품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이기 때문에 유명한 연출가와 세계적인 배우가 협업한 작품이 많다. 덕분에 질리언 앤더슨, 앤드루 가필드, 루스 윌슨, 주드 로의 연기도 화면에 단단히 박제됐다. NT Live로 중계한 작품은 저작권과 수익 분배 문제로 온라인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셔널 시어터 아카이브를 예약 방문하면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공연을 생중계하면 관객이 줄어들 거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그간 연구 결과로는 관객 유입 효과가 있어서 오히려 관객 수가 늘면 늘었지 줄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NT Live가 앞장서서 셰익스피어나 그리스 비극 같은 고전 작품을 뛰어난 퀄리티로 제작해 상영관에 송출하는 통에 지방 극단이 제작 기회를 빼앗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NT Live의 세계적인 성공 이후 공연 영상화 시장이 커지고 있다.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와 로열 발레단(The Royal Ballet) 작품도 아직까지는 영국 내 한정이지만 영화관에서 종종 보인다. 영상으로 박제된 공연은 온라인에도 있다. <빌리 엘리어트> 1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중계됐던 <빌리 엘리어트 더 뮤지컬 라이브>는 DVD로 발매되어 아이튠즈 등에서 구매와 대여가 가능하다. ‘브로드웨이HD’는 2016년에 브로드웨이 최초로 뮤지컬 <쉬 러브스 미>를 생중계해서 기네스북에 올랐고, 이후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어 뮤지컬과 연극 실황 녹화본을 유료로 제공하고 있다. 보유작이 많지만 <헤드윅>처럼 국내에선 돈을 내도 못 보게 해둔 작품도 있다. 영국에서는 ‘디지컬 시어터’가 온라인 시장을 열었는데 아직까진 영국 위주라 해외에 제공하는 작품 수가 적다.
NT Live는 10주년을 맞이한 올해도 그저 꾸준히 작품을 쌓아갈 계획이라고 한다. 예정작 중에 눈여겨보고 있는 작품이 많으니 어서 국내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1호 2019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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