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오래 익혀 얻은, 시끌벅적한 젊음
스웩의 에너지
힙합에 맛을 들이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그냥 틀어놓고 쉽게 듣는 음악에 익숙한 귀에 가사도 많고 리듬도 빠른 힙합은 선행 학습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장르였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장벽은 사실 ‘스웩’이었다. ‘나 멋있지? 나 죽이지?’를 끊임없이 과시하는 자기애가 스웩이라면 ‘아, 이 음악은 나랑 안 맞겠다’ 싶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날것의 매력이 있더라. 남들 눈 의식하지 않고 유치하든 모자라든 이게 나야, 자기를 감추지 않는 솔직함이 단단해 보였다. 이런 태도야말로 철학자들이 말했던 자기배려 아닐까? 자기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을 향해 말을 던질 수 있다. 100분의 시간을 줘도 생각 하나 섞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토론보다, 노래와 삶이 어긋날 때 살벌하게 물고 뜯는 래퍼들의 디스전이 훨씬 세상에 이로운 건 이 때문이다. 힙합이야말로 지행일치의 도덕률에 가장 충실한 장르인 셈이다.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한 자존심, 이게 스웩이구나. 허세인 줄 알았더니 멋이었다.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 쏟아지는 신작의 하나에 그치지 않은 것은 제목에 걸맞은 ‘스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을 다룬다는 작품에 여성이 없고 예술을 다룬다는 작품에 예술이 없는데, 스웩을 내세운 이 작품에는 자기만의 멋이 있으니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기에 충분한 셈이다. 허술함을 자주 들키는 건 사실이다. 시조를 소재로 삼는 작품치고는 단어를 만드는 솜씨가 형편없더라. 시조를 통해 세상을 개혁하고자 하는 옹골찬 비밀 집단의 이름이 골빈당이라니, ‘빛나는 뼈다귀’라는 한자를 억지로 갖다 붙이고 ‘뼈를 남길 각오’로 투쟁한다고 우기는데 영 말이 안 된다. 비밀시조집단이 남길 게 왜 뼈인가. 시여야지. 국봉관도 마찬가지다. 백성들의 웃음과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비밀시조장이라면 반체제여야지 ‘국뽕’이어서야 되겠나. 재치를 발휘하는 순간에 유치해지는 지점이 이 작품에는 꽤 있다.
그런데 이런 유치함마저 이 작품의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분명하다. 이 작품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들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데 쏠려 있기 때문이다. 요즘 흥행하는 뮤지컬의 트렌드나, 비슷한 부류의 작품이 있는지의 여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남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자기네들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드느라 잔뜩 신이 나 있는 거다. 이 작품의 분위기는 정적인 분위기에 붙잡혀 있는 여타의 창작뮤지컬과는 사뭇 달라서 왁자지껄 뿜어내는 유쾌한 에너지가 적잖이 역동적이다. 이런 에너지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스웩’일 터. 이런 창작뮤지컬은 정말 오랜만이다. 설사 작품이 허술하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떤 빈틈도 꽉꽉 채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보충재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람.
‘젊은 감각’의 아쉬움
사실 이 작품의 모양새는 여러 면에서 볼 때 뮤지컬보다는 영화나 TV 드라마에 가깝다. 일단 이야기의 분량이 많다. 권력의 암투, 출생의 비밀, 적과의 사랑, 불의에 맞선 투쟁, 최종적인 승리까지, 이야기의 변곡점마다 설명해야 할 게 많은 설정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당연히 등장하는 인물도 많다. 창작뮤지컬에서는 드물게 16명의 배우가 등장하고, 저마다 나름대로의 개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야기의 스케일에 맞는 등장인물의 규모인 셈이다. 이야기의 전개도 영화나 TV 드라마의 전형적인 흐름에 가깝다. 초반에는 발랄하고 유쾌한 분위기였다가 중반에는 불거진 위기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막판에는 비장하게 주제에 천착하는 식이다. 시조와 힙합을 접목한 경쾌한 쇼로 일관하기보다는 평등한 세계를 위한 민초들의 승리라는 드라마의 무게에 중심을 두더라.
뮤지컬의 관점에서 볼 때 아쉬움이 생기는 건 이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의 스케일에 비해서 사건과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약하다. 주요 인물들의 사연과 관계는 갑작스럽거나(보자마자 스승의 아들인 것을 알아보다니!) 기계적일 때가 많고(아버지의 한, 갚고야 말겠다!), 감초들의 역할은 사족일 때가 많다. 권력자의 부하인 일본 무사가 꼭 있어야 하는 역할일까? 몇 번의 사소한 웃음은 즐겁지만 몇 개의 중요한 행동은 억지스럽다. 드라마나 영화라면 필요한 역할이겠지만 뮤지컬에서는 존재 이유가 미미하다. 미장센의 방식에서도 이 작품은 TV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순서에 맞게 인물과 이야기를 나열하고 연결하는 데 무리는 없지만 시공간을 버무려 극적인 밀도가 배가되는 공연다운 상상력을 장면의 미장센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익숙한 퓨전 사극의 드라마적 전형에 가두기에 가장 아까운 것은 이 작품의 낭만적 상상력(시가 세상을 다스린다!)이다. 이 낭만적 상상력의 도구는 다름 아닌 노래와 춤이니, 극 초반부터 시조에 맞춘 힙합 리듬의 노래와 재치와 감각을 갖춘 춤의 에너지는 드라마의 재미를 크게 앞선다. 이 퍼포먼스만으로도 이 작품은 볼만한 이유와 본 이후의 만족감을 충분히 제공한다. 하지만 드라마에 집중할수록 음악은 초반의 에너지를 잃어버린 채 전형적인 뮤지컬 넘버에 가까워져버린다. 극의 후반에서 내면의 고민을 토로하는 주인공들의 노래가 ‘뮤지컬답게’ 이어질 때 극의 흐름은 오히려 지지부진해지더라. 이 작품의 음악은 애초부터 뮤지컬 넘버이기보다는 퍼포먼스의 재료에 가까웠던바, 공연의 에너지보다 드라마의 감정이 앞설 때 음악의 매력은 쉽게 반감돼 버린다. 진지한 드라마가 되기보다는 광대의 놀이판이 되겠다는 의지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한 공연인 셈이다, 이 작품은.
개성과 다양성
재미있는 것은 이런 면모마저도 이 작품의 개성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뮤지컬보다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고, 뮤지컬 넘버를 듣는다기보다는 쇼 무대를 보는 것 같지만 이 작품은 자기 스타일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걸까? 물론 기발하면서도 경쾌한 힙한 시조 때문이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어 보인다. 단서는 이야기에 있다. 분명 기계적이고 전형적인 흐름인데도, 갑작스러운 비약이 맞는데도, 이 작품의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개연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달려간다. 빈틈이 있는데도 비어 보이지는 않는 거다. 그 비결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야기가 많다는 데 있다. 세밀함과 촘촘함은 떨어져도 이야기가 넘쳐나는 덕분에 전체적인 전개가 다이내믹해진 거다.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사건과 인물의 면면은 많은 이야기를 줄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공백처럼 보인다. 없어서 비는 것이 아니라 많아서 건너뛴 격이다.
이는 이 작품이 오랜 시간 동안 준비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시조와 힙합을 접목한 아이디어 하나에 이야기를 붙였다가 떼었다가를 반복하느라 쌓인 이야기의 부산물이 많은 거다. 그 과정은 꽤나 지난했겠지만, 이런 지난함이 꼭 지루한 것만은 아니었을 거다. 배우들의 에너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양희준을 비롯한 이 작품의 신인 배우들은 작품 안에서 거침이 없다.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자유자재로 말하고 노래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의 분량이 주어져야 하는바, 준비된 배우로서 넉넉한 위상을 보여주는 신인 배우들에게서도 빨리 만들어진 작품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숙성된 감각이 느껴진다. 젊디젊은 공연에서 시간의 공력을 보게 되니 일상의 진리가 떠오른다. 사람이나 작품이나 젊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느니.
이 작품이 다시금 확인시킨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뮤지컬은 공연을 처음 보는 관객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장르라는 사실. 당연하지만 어느새 새삼스러워진 사실이기도 하다. 만만찮은 티켓 가격으로 진입 장벽이 높은 초대형 뮤지컬이나, 관극을 위해 숙지해야 할 룰이 많은 소극장 뮤지컬이나, 이 모든 흐름에 다양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가격에서나 취향에서 중간층이 볼만한 뮤지컬이 많아져야 한다. 그런 기준에 적합한 뮤지컬이 바로 이 작품이니, 자기만의 개성으로 다양성을 다지는 역할을 한 셈이다. 가히 스웩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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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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