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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CULTURE REVIEW]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총체극의 언어 [No.193]

글 |정수연 공연 평론가 사진제공 |PAGE1 2019-10-28 6,147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총체극의 언어 




총체극이어야 할 이유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공연하는 극장이 어디인지를 검색하는데 몇 년 전에 했던 뮤지컬 정보만 줄줄이 떴다. 이상하네. 분명 개막을 했는데 왜 정보가 안 뜨지? 알고 보니 검색어를 잘못 설정한 탓이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총체극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가는지는 미처 몰랐더랬다. ‘도리안 그레이’를 찍으니 이전 작품과 정보가 섞였는데, 총체극을 찍으니 정보가 깔끔해졌다.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라. 사실 총체극은 오래전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이다. 집회의 일환으로 노래패와 탈춤패와 연극반이 모두 어우러져 만든 공연의 이름은 언제나 총체극이었다. 서울예술단의 전신인 88예술단의 초창기 공연도 총체극이었지 아마. 총체극은 아마추어의 목적극이거나 장르를 다 섞어놓은 공연이거나 이와 비슷한 유형의 공연을 휘뚜루마뚜루 부르는 호칭이었다. 제대로 완성된 공연으로 실현되기도 전에 총체극이라는 단어는 낡아서 남루해지다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앞에 붙은 총체극이라는 이름은 의미심장하다. 선입관의 더께에 가려져 있던 총체극의 의미가 회복될 수도 있고, 사실은 세련된 공연의 화술임을 새삼 소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총체극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제시한 토털 시어터(Total Theatre)의 번역어로서 공연을 이루는 모든 예술적 수단이 공연 언어로서 동등한 지위를 회복할 때 언어라는 중심을 넘어서는 자리에서 만들어지게 될 통합적인 공연 예술을 가리킨다. 통합성이란 각각의 예술 언어가 고유하게 존재하면서도 그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뜻하는바, 소리는 의미를 만나 말이 되고, 말은 음악을 입어 시가 되며, 시는 몸을 입어 움직임이 되고, 움직임은 공간을 얻어 이미지가 된다. 하나의 장르로 규정될 수 없는 공연의 새로운 언어에 토털이라는 이름만큼 적합한 것도 없는 셈이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바로 이런 의미의 ‘총체성’을 지향하는 작품이다. 2016년에 이 작품을 뮤지컬로 만들었던 경험이 연출가 이지나로 하여금 이 작품의 갈 길을 새롭게 모색하게 만든 길잡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원작을 공연 언어로 해석하기보다 이야기로 재현하는 방식을 택한 뮤지컬은 직설법에 가까웠으니, 배우의 얼굴이 아름다움이 되고 초상화의 얼룩이 추함의 상징이 된 ‘도리안 그레이’는 무대 위에 얇디얇은 홑겹의 의미만을 남겼더랬다. 이지나의 과감함이 보이는 지점이 여기인데, 그는 자기가 빠졌던 함정 앞에 다시 서서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은 작품에 참여하는 이들의 이름에서부터 확연해진다. 정재일, 이자람, 김주원, 김보라, 여신동 등 각각 자기의 예술 언어를 분명히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작품에 포진해 있으니 말이다. 이 사람들을 한데 모은 것만으로도 연출가로서 이지나의 능력은 한 번 증명된 셈이다.  




빗나간 언어                     
하지만 그의 능력이 두 번 증명되기에 작품은 여러모로 애매모호하다. 총체극을 지향하고 있지만 정작 ‘총체극의 언어’를 가진 배우들에게 다른 언어를 부여하는 것부터 그렇다. 이자람에게는 소리가 있고 김주원에게는 춤이 있건만, 정작 그들에게 주어지는 공연 언어는 약간의 움직임과 오직 대사뿐이다. 소리꾼과 무용수는 이 작품에서 온전히 말하는 배우로 변신한다. 그들이 일군 말하는 배우로서의 성취는 뒤로 미뤄두자. 문제는 새롭게 부여된 말이라는 도구가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예술 언어보다 총체극의 언어로서 풍성한지의 여부이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이 선택한 말의 대사는 더할 나위 없이 관념적이다. 관념을 담아내는 데 가장 초라한 그릇이 말이기에 대사에 한정된 공연의 언어를 확장하려던 기획이 원래 총체극의 시작 아니었나. 하지만 이 작품에서 배우로서 무대에 선 예술가들의 공연 언어는 ‘총체적’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놓고 보니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시감이다. 음악이 극 전체에 기여하는 분량이 많은 것이나, 수직과 수평에서 직선으로 쏘아대는 강렬한 조명도 그렇고, 영상의 활용도가 높은 것을 볼 때, 이 작품은 총체극으로서의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연출가 이지나가 해왔던 스타일을 그저 연장한 것임을 금세 알 수 있는 거다. 물론 같은 텍스트를 다시 연출하는 만큼 이전보다 깊어진 부분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도리안 그레이라는 인물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형상과 이미지의 고정된 틀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경우이다. 배우의 외형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시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빛의 조합으로 도리안 그레이가 소개될 때 아름다움이란 포착되지도 않고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원작의 주제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름다움의 형상을 떠올리는 상상의 폭이 더 넓어지더라.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버려두듯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이 미학적인 태도일 것이다. 도리안 그레이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건만 그 산을 넘는 이 작품의 태도는 충분히 미학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의 미학은 작품 전체로 확산되지 못한다. 이 작품을 채우는 두 개의 축은 시청각의 이미지와 말의 관념인데, 이 두 가지 요소가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부조화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관념은 더없이 표피적이다. 21세기의 예술가들에게 19세기의 예술론(‘예술은 광기야!’ ‘비이성적인 것에서 예술은 탄생하지!’ ‘예술은 핏빛 발자국이지만 모두가 예술을 숭배하게 되길!’)을 부여했을 때 이들의 말은 살아 있는 말이라기보다는 비어 있는 말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비어 있는 말로 예술과 아름다움을 설명하려 할 때 작품은 점점 공허해진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말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시청각적 이미지의 몫일 터. 이들은 자기 역할에 부응하도록 작품 내내 열일을 해낸다. 하지만 표현의 욕망을 내려놓지 못한 말이 무대를 채울 때 결국 모든 이미지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축소되게 마련이다. 어쿠스틱에서부터 전자음악을 넘나드는 정재일의 유려한 음악마저도, 개별 음악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인물과 장면을 설명하는 배경으로 기능이 제한되어 어느새 평범해져버린다. 애매한 추상을 고집하던 영상마저도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연인을 꽃으로 표현하더라. 설명의 완성이다. 




회복되어야 할 공연의 언어 
만약 소리꾼에게 소리를 주고 무용수에게 춤을 주며 음악가에게 극의 주도권을 주었다면 이 작품은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번득이게 살아 있는 광기는 굳이 양극성 성격장애라는 질병으로 온건해지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죽도록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굳이 안락사라는 도덕적 죽음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19세기의 예술론을 현대의 감각으로 풀어내기에 각색된 대본보다는 그들의 예술 언어가 더 적합했을 테니 말이다. 연출가로서 이지나는 미장센을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뮤지컬계의 앞자리에 있을 만큼 유능하지만, 대본을 구성하는 작가가 될 때는 여러 면에서 한계를 내보인다. 대사는 과도한 관념으로 부풀려지고 이야기는 비약을 거듭하며 과장되는 식이다. 아쉽게도 연출가로서 이지나가 잘하는 것과 작가로서 이지나가 하고 싶은 것은 아직 행복하게 조화를 이룬 적이 없다. 그의 작품이 자주 과잉의 함정에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래도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제대로 된 총체극이 되기 위해 되비쳐 봐야 할 거울은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아니라 전작 <더데빌>인 것 같다. 동일한 함정에 빠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과 <더데빌>은 많이 닮았으니 말이다. 연출가 이지나가 이 작품을 총체극으로 완성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긋난 언어부터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것이다. 예술가들에게는 예술의 언어를, 21세기의 인물들에게는 지금 여기의 언어를, 무대 위에 선 배우에게는 한국말을. 마이클 리의 영어는 이자람의 소리나 김주원의 춤이나 정재일의 음악처럼 총체극의 재료로 사용할 만큼 ‘총체적’이진 않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3호 2019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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