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뮤지컬 속 교복 디자인
학창 시절, 불편한 교복에 몸을 구겨 넣고 불평하다가도 옆 학교의 예쁜 교복을 보면 부러움의 눈길로 쳐다보곤 했던 기억이 있는지? 연극, 뮤지컬 무대에 등장하는 교복 역시 남다른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이 교복들, 알고 보면 그저 보기 좋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각 학교와 학생의 특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무대 의상으로서 교복은 어떻게 디자인되는지, 공연계에서 이름난 학교의 교복들을 살펴보았다.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
도연 의상디자이너
교복 가톨릭 학교라고 해서 반드시 단정한 교복만 입는 건 아니다. <베어 더 뮤지컬>은 보수적인 가톨릭 기숙학교인 성 세실리아 고등학교가 배경이지만 학생들의 옷차림은 자유분방하다. 기본적으로 검은색을 사용해 학교의 보수성을 표현하되, 넥타이와 양말, 조끼의 디자인은 인물마다 각양각색이다. 이 작품의 의상은 시공간적 배경을 고증하기보다는 각각의 인물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었다. 극 중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입은 교복 또한 학교가 주는 중압감보다는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나도록 디자인했다.
엠블럼 현대 미국의 기독교 학교 엠블럼을 참고해 디자인했다. 성 세실리아 학교의 이니셜(St. Cecilia School)과 십자가를 배치해 가톨릭 학교임을 표현했다.
연극 <알앤제이>
도연 의상디자이너
교복 <알앤제이>에 등장하는 남학생들은 가톨릭 기숙학교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위치한 학교인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의상디자이너 도연이 임의로 정한 시대적 배경은 인류 역사의 가장 잔혹한 페이지라 할 수 있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다. 그가 대본을 읽고 떠올린 질문 ‘어떻게 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인간 그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반영하기에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료 조사 중 그의 관심을 끈 것은 1900년대부터 지금까지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착용하고 있는 반바지 교복이다. 한국에서는 낯선 형태의 교복이지만, 디자이너 자신도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1년 내내 긴팔 상의에 반바지와 니삭스를 착용했다고. 이 반바지 교복은 활동성이 높아 배우들의 격렬한 움직임을 보조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극 중 학생들은 밤마다 금서로 지정된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낭독하며 그들만의 공연을 펼치는데, 이때 교복 재킷과 조끼를 벗어던지고 셔츠를 빼 입거나 소매를 걷어붙인다. 갈수록 땀에 젖어 흐트러지는 교복을 통해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학생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엠블럼 억압적인 가톨릭 학교임을 나타내기 위해 사방이 막힌 틀 안에 커다란 십자가를 배치하고, 금지와 경고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메인 컬러로 사용했다. 하단의 휘장에는 학교의 교육 방향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기도, 우정, 배움)를 나열했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이주희 의상디자이너
교복 <히스토리 보이즈>의 배경은 1980년대 초반, 영국 북부 쉐필드의 한 공립 고등학교. 작은 마을 학교지만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우등생이 모인 대학 입시반의 이야기다. 이주희 의상디자이너는 이들의 외양이 지금의 한국 고등학생과는 한눈에 구별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1920~1930년대 아이비리그 교복을 참고하여 의상을 디자인하였다. 재킷 원단도 울이 많이 섞인 것을 택해 영국 느낌이 나게 했다. 또한 각 인물의 성격을 고려하여 교복을 입는 방식이나 바지의 핏을 달리하였다. 비교적 순종적이고 교칙을 따를 법한 학생들은 단정하게 타이를 매고 조끼까지 갖춰 입는 반면, 자유로운 학생들은 타이를 느슨하게 매거나 아예 매지 않고, 셔츠를 밖으로 내어 입거나 안에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엠블럼 엠블럼에 들어 있는 학교의 설립연도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학교임을 감안하여 디자이너가 임의로 설정했다. ‘NIHIL ME TERRET’은 ‘두려울 것 하나 없다’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어울릴 만한 문구를 선택하였다.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김지연 의상디자이너
교복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동시대적인 의상을 사용하여 무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지금 우리의 이야기임을 나타냈다. 상류층이 모여 사는 1지구 안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만 입학할 수 있는 프라임 스쿨의 교복은 명문 학교다운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느낌을 강조했다. 하얀 양복지로 재킷을 만들고 카라와 소매 끝은 벨벳 라인으로 장식했다. 셔츠는 신부복을 연상시키도록 디자인해 엄격한 학교 분위기를 드러냈다. 이는 프라임 스쿨이 한때 수도원이었던 건물을 사용하는 기숙학교라는 점에 착안한 아이디어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볼로 타이. 셔츠를 차이나 카라로 디자인하고 나니 일상적인 교복 타이가 모두 어울리지 않아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다. 피날레에서 입고 나오는 교복 코트는 여학생은 원 버튼, 남학생은 더블 버튼으로 디자인했다. 극이 진행될수록 다윈의 의상은 새하얗고 단정한 학생복에서 어둡고 어른스러운 정장 스타일로 바뀌어 가는데, 이를 통해 그가 악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한편, 아버지 세대인 니스, 버즈, 제이의 교복은 과거 장면에 등장하는 교복인 만큼 살짝 촌스럽게 디자인되었다. 또한 프라임 스쿨과 달리 자유로운 학교임을 보여주기 위해 딱딱한 재킷 대신 카디건을 입는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초록색 카디건에 레몬색과 감색이 섞인 발랄한 타이를 매치해 절제된 색상의 프라임 스쿨 교복과 대비시켰다.
엠블럼 ‘독수리 두 마리가 마주보고 선 알파벳 P자를 받들고 있는 프라임 스쿨 문장’. 뮤지컬에 등장하는 프라임 스쿨 엠블럼은 원작 소설에 묘사된 그대로 디자인되었다. 교복 상의 가슴께에 프라임스쿨을 상징하는 P자가 금실로 새겨져 있다는 점도 원작과 같다.
연극 <비(B)클래스>
시래(우지숙·우지영), 전남규 의상디자이너
교복 <비(B)클래스>의 배경은 상류층이거나 탁월한 실력을 갖추어야만 입학할 수 있는 봉선예술고등학교.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사립학교로 설정된 만큼 유럽의 제복과 명문 학교 교복을 참고해 무대 의상을 디자인했다. 교복 재킷은 일반적인 테일러드 재킷 대신 영국 군복을 응용하여 차이나 카라로 디자인했고, 앞섶과 소매에 짙은 배색 라인을 넣어 절제되고 경직된 학교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곡선을 이룬 밑단과 은은한 파스텔 색상이 학생들의 음악적 감성을 표현한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조건에 따라 A클래스와 B클래스로 등급이 나뉘는데, 2017년 초연 때는 소매 띠로 이 등급을 나타냈지만, 2018년 재연부터는 가슴에 달린 와펜으로 표현하고 있다. 같은 교복이지만 교복 단추를 채웠는지 아닌지, 셔츠를 빼 입는지 아닌지에 따라 학생들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수현은 재킷을 벗거나 넥타이를 하지 않은 모습으로 어른들이 만든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한다. 는 2019년 여학생 버전으로도 공연되었는데, 여학생 교복은 기존의 남학생 교복에서 바지만 치마로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 윤희(남학생 수현과 같은 역할)는 자유분방한 캐릭터를 살려 편안한 바지를 입는 것으로 차별화했다.
엠블럼 엠블럼은 무대디자이너 손지희가 디자인했다. 학생들이 서열화된 학교 분위기에 짓눌려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무대 뒤를 크고 화려한 학교 엠블럼으로 장식했다고. 설정상 서양에서 근대 문화가 유입되던 시기에 세워진 학교이기 때문에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월계수 잎,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사자를 넣어 디자인했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
도연 의상디자이너
교복 1930년대 영국의 상류층 자녀들만 모인 명문 기숙학교. <어나더 컨트리>의 배경이 되는 이 학교는 실존하는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 이튼 칼리지를 모델로 삼았다. 무대 의상 또한 이튼 칼리지의 교복을 최대한 고증하여 만들어졌다. 이튼 칼리지의 대표적인 교복인 블랙 테일 코트에 웨이스트 코트, 화이트 셔츠, 그레이 핀스트라이프 바지를 기본으로 착용하되, 학교 내 권력과 신분 차이에 따라 디테일이 달라진다. 학생회 ‘투웬티투’의 일원인 바클레이, 델러헤이는 실크 조끼와 화이트 보타이, 가슴에 꽂은 코사지로 신분의 차이를 드러낸다. 기숙사 선도부 ‘프리펙트’에 속한 멘지스, 파울러, 샌더슨 역시 화려한 실크 조끼를 입어 높은 신분과 가문의 권위를 드러낸다. 반대로 기숙사에서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하급생 워튼은 짧은 재킷을 입고, 다른 기숙사생인 하코트는 보타이 컬러에 차이를 뒀다. 주인공 가이 베넷은 흐트러진 교복과 튀는 양말을 이용해 학교 규율에 저항하는 성격을 표현했다. 크리켓 시합, 사열식 때 입는 의상 또한 그 시대 복장을 최대한 반영하여 디자인했다. 크리켓 의상 바지에는 당시 운동복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중 앞 주름(Tuck)을 넣고, 재킷 또한 여유 있는 사이즈로 만들었다.
엠블럼 <어나더 컨트리>의 포스터를 비롯한 전체 그래픽 디자인을 담당한 스튜디오 샘의 이샘 디자이너가 엠블럼 디자인을 맡았다. 왕관, 월계수 같은 오브제로 묵직한 분위기를 살리되, 밝은 컬러를 사용해 신인 배우들이 출연하는 신선한 작품이라는 이미지를 주었다. 가이 베넷이 입는 크리켓 의상 색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0호 2020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피처 | [CLOSE UP] 연극·뮤지컬 속 교복 디자인 [No.200]
글 |안세영 2020-05-30 6,748sponsored advert
인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