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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LETTER] 인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No.210]

글 |한정석(극작가)·이선영(작곡가) 사진 | 2022-09-06 735

인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한정석 × 이선영 세 번째 편지

 

팔색조 같은 이선영 작곡가님께
드디어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전히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매일 어떤 위기가 닥칠지 모르는 요즘이지만,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니 반갑고 설레는 마음이 듭니다. 마음과 달리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아 문제지만요.


첫 연습 날, 연습실에 들어서며 미리 와 있던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쪽으로 걸어오더라고요. ‘설마, 나한테 오는 건가?’, ‘아, 어떡하지... 방금 인사했는데 또 무슨 얘길 하지?’ 하는 생각과 함께 긴장감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혹시 악수를 청하면 나도 여유 있게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물어봐야지.’라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배우는 제 예상보다 한발 더 나아가 포옹을 시도했고,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아, 어떡하지...”가 전부였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요. 잠시 후 그 배우는 너그러운 얼굴과 다 이해한다는 말투로 “하하하, 여전히 어색해하시네요.” 하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억울했습니다.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쭈뼛대지 않고 점잖은 작가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는데, 시작부터 망쳐 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했습니다. ‘다음 연습 때는 꼭 자연스럽게 굴어야지.’, ‘작곡가님처럼 설명도 잘해 주고, 농담도 시도해 봐야지.’, ‘절대 내 이미지를 쭈뼛대는 모습 하나로 기억되게 하지 말아야지.’, ‘나에게도 다른 멀쩡한 모습도 많다는 걸 알려 줘야지.’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습니다. 제가 이번 편지를 이렇게 부끄러운 고백으로 시작한 이유는 사실 작곡가님이 지난번 제게 던진 질문(이번 작품을 통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 그리고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길 바라는지?)에 대한 대답이 제 고백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입니다.


예전에는 작가의 역할이 모든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바람이었는지 절실히 느낍니다. 세상에는 제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너무 많고,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주변인들에게도 종종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니까요. 심지어 저조차 제 자신이 낯설 때가 있고요. 그래서 요즘은 ‘내가 파악했다고 여긴 것들이 사실 단편적인 판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곱씹으며 누군가를 함부로 단정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에는 이런 제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가정 아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관객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작품이 되면 좋겠습니다.


편지를 쓰는 동안, 쇼맨 팀 카카오톡 단체방에 음악 연습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온몸을 들썩거리며 노래를 열창 중인 배우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작곡가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랑 통화하실 때는 대체로 매가리가 없으셨는데, 음악 연습 시간에는 마치 스타 에어로빅 강사님 같은 흥과 활력을 뽐내시다니. 역시 인간은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편지를 마무리하며 저 역시 작곡가님께 비슷한 질문을 던집니다. 작곡가님은 어떤 목표를 갖고 이번 작품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게 대체 뭐길래 연습실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겁니까?


2022. 2. 5.
정석 드림

 

에어로빅 강좌라도 끊어 드리고 싶은 한정석 작가님께
작가님 말씀대로 ‘드디어!’ 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작품을 썼던 지난 시간 동안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샌가 그날이 와 버렸네요. 첫공(연)도 이렇게 믿을 수 없이 들이닥치겠지요? 코로나 때문에 너무나도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공연계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하던 대로 열심히 나아가는 것뿐이겠지요.


아! 시작을 망쳐 버렸다는 작가님의 걱정과는 달리 (그냥 다짐도 아니고 다짐에 다짐까지 하셔서 그런지) 연습실에서 그리 못나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꽤나 진지하고 말도 썩 잘하는 작가처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역시 사람은 뭐라도 계속하면 실력이 느나 봅니다.


배우들을 연습시키는 저의 모습이 스타 에어로빅 강사 같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연습실에서 흥이 나 있는 제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 싫어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람들 앞에서 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음악감독이라는 역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맡는다는 걸 작가님도 알고 계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사 수능을 앞둔 학생들처럼 연습하고 있는 우리 배우들에게 에너지를 많이 주고 싶어서, 아직 오지 않은 여름의 활력까지 끌어다 쓰고 있는 중입니다. 음악 연습을 시작한 날, 노래를 처음 불러 본 배우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6개월 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해 인류가 곧 멸망한다.”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 같았거든요. 첫 연습이 끝난 뒤 잔뜩 내려온 그들의 다크 서클을 보고 ‘내가 이번에도 곡을 정말 어렵게 썼구나.’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우들에게 고난이 되어 버린 이 음악이 완성될 때까지 저 역시 에어로빅을 멈추지 않아야겠습니다.


저에게 어떤 목표를 갖고 이번 작품을 준비하느냐 물으셨지요? 처음 이 작품을 제안받고 생각했던 건 ‘관성대로 쓰지 말자.’였습니다. 그동안 작가님과 만든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기도 했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익숙하고 편한 것보다는 내게 더 어려운 선택을 해 보자.’라고 다짐했습니다. ‘대담하게. 위험을 두려워하지 말 것.’ 이 마음을 붙잡고 작업해 온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실패를 하게 되더라도 무언가 도전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이 과정 자체를 목표로 삼아 보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계속 제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중입니다. 많은 다짐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몰라주면 어쩌지? 외면당하면 어쩌지?’ 밀려오는 불안함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을 원동력 삼아 잘 버텨 봐야겠지요. 제 곁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동료들이 있으니까요.


모두가 건강하게, 무사히 이 시간을 함께 버텨 내길 바라며.


2022. 2. 6.
선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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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0호 2022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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