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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LETTER] 나의 가장 솔직한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 [No.214]

글 |오세혁 작가, 다미로 작곡가 사진 | 2022-10-11 683

나의 가장 솔직한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

오세혁 × 다미로 두 번째 편지

 

<홀연했던 사나이>의 막이 오를 때마다, 이건 혹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우리들의 레드카펫’이 들려오지. 그럼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돼. 나도 이런 내가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이 공연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 이 이야기는 내가 시작한 게 아니야. 늘 누군가가 나타나 이야기를 만들게 했고, 만들어진 이야기를 희곡으로 쓰게 했고, 희곡을 뮤지컬 극본으로 거듭나게 했고, 뮤지컬 극본을 무대 위에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었지.

 

새벽부터 기억을 더듬어서 그들의 얼굴을 모두 떠올려 보았어. 시작은 12년 전이야. 2011년의 어느 날, 연극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스물넷에 극단 걸판을 만들어서 활동했지만 단원들 중에 전공자가 한 명도 없었어. 언제나 배움에 대한 갈증이 절실했어. 정신을 차려보니 서른이었어. 더 늦기 전에 학교에 가고 싶었지. 다행히 현장 공연인을 위한 과정이 있었고,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어. 나는 원래 동기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어. 극단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수업을
듣고 조용히 공연을 하러 갔어. 그런 패턴이 반복되었다면 아마 우리는 만나지 못했겠지.

 

우리가 만나게 된 건 두 가지 인연 때문이야. 나는 그때 윤대성 선생님께 희곡 수업을 들었어. 학기 중에 제대로 된 작품 한 편을 완성해야 학점을 받을 수 있었지. 선생님은 엄격하셨어. 완성된 희곡을 직접 소리 내어 읽으시다가 조금이라도 꾸며낸 것 같은 부분이 보이면 가차 없이 중단하셨지. 내가 쓴 거의 모든 희곡이 절반 이상 읽힌 적이 없었어. 그러다 어느 날 나직하게 말씀하시더라고. 애써 머리 굴리지 말고 네가 겪은 걸 쓰라고. 이 세상에 똑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때 갑자기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 거야.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에 와서 언제나 공짜 엽차만 마시고 사라지던 아저씨가 있었거든. 그 아저씨는 늘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고, 그게 영화 시나리오라고 했어. 일부러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나한테 대사를 읽게 하고, 영화배우의 소질이 있다며 칭찬했지. 그럼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서 커피와 라면을 대접해 주었어. 그렇게 보란 듯이 나를 앉혀놓고 공짜를 즐기던 아저씨는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지. 어머니는 사기꾼이라며 화를 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어.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알면서도 속아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왜 속아준 걸까.

 

그렇게 희곡 ‘홀연했던 사나이’가 탄생했어. 윤대성 선생님은 처음으로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셨지. 하지만 내가 조광화 선생님의 희곡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다면, 그 이야기는 연극에서 멈췄을지 몰라. 선생님이 어느 날 내게 물으셨어. 뮤지컬을 해볼 생각은 없냐고. 가능성 넘치는 작곡가가 있는데 둘이 잘 맞을 것 같다고. 난 그때까지 뮤지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갑자기 뮤지컬이 하고 싶어졌지. 그 작곡가가 나랑 동갑이라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야. ‘그 작곡가는 무슨 이유로 나랑 똑같은 나이에 뒤늦게 학교에 들어왔을까?’ 이 궁금증 하나로 뮤지컬 수업을 신청했어.

 

우리는 만나자마자 술을 참 많이 마셨지.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꼭 해가 뜨는 걸 보고 나서야 헤어졌지.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혼자 새벽 거리를 한참 걸어 다녔어. 난 그때 꿈을 꾸고 싶었어. 살아있는 내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어줄 아주 커다란 꿈. 근데 그 꿈이 떠오르지 않아서 늘 잠이 오지 않았지. 학교 다니는 내내 잠이 오지 않았어. 꿈을 찾지 못한 채 일 년이 지나갔지. 근데 갑자기 네가 졸업을 한다는 거야. 알고 보니 나보다 일 년 선배였었지. 나는 아찔해졌어. 저 친구가 학교를 떠나면, 난 계속해서 잠이 오지 않겠구나.

 

네 졸업식 날의 술자리였던가. 내가 술을 따라주며 말했을 거야. 이제 네가 졸업하면 나는 무슨 재미로 술 먹지? 그때 네가 불쑥 말했지. 네가 빨리 졸업해야지. 그래야 우리 뮤지컬을 만들지. ‘우리 뮤지컬’이라는 다섯 글자가 심장을 때리더라고. 아, 이게 꿈이 될 수 있겠구나. 나 혼자 꿈꾸지 않아도 되는구나. 공통의 꿈을 같이 꾸면 되는구나. 더군다나 너는 우리의 첫 뮤지컬을 꼭 나의 희곡으로 하고 싶다고 했지. 나의 가장 솔직한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로. 그 순간 모든 인연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 온 거야. “음, 나한테 <홀연했던 사나이>라는 대본이 있는데....” 그렇게 12년이 흐르고, 우리는 12편을 같이 하고 있어.

 

2022.06.09.
세혁 보냄

 

*


아마 비가 엄청 오던 날이었을 거야. 뮤지컬 수업을 담당하셨던 조광화 연출님이 내게 그러셨어. 학교에 글 잘 쓰는 이상한 놈(?)이 입학했으니 만나서 작품 이야기를 해보라고. 그날 마침 학교에서 너를 우연히 보았고, 내가 다짜고짜 다가가 인사를 했지. 뭐랄까... 세혁의 첫인상은 참 묘했어. 이름 모를 책 한 권을 손에 꼭 쥔 채로 “아이고, 네네! 예예~!”를 반복했는데, 눈빛이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거든. 우린 바로 술집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

 

어렸을 적 시인이 되고 싶었다던 이야기. 초록색 풀로 차를 끓여 먹었던 이야기.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친 이야기. 대학 시절의 풍물놀이패 이야기.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연극 이야기까지. 세혁이 해준 수많은 이야기에는 삶의 철학이 가득 담겨있었어. 뭐, 어렵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 그냥 함께한 시간들이 너무나 재미있었어. 그날의 인연으로 너는 내 졸업 작품의 연출이 되어줬지. 학교를 떠나는 졸업식 날,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며 졸업을 축하한다고 하던 네가 생각나. 돈이 없어서 대신 꿈을 선물하겠다며 내 손에 쥐어 준 로또 한 장, 정말이지 오세혁다운 인사였어.

 

네가 여러 대본을 보내준 그날, 나는 <홀연했던 사나이>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어. 분명 문법을 파괴한 희한한 글인데 너무 재미있었거든. 누가 뭐래도 가장 오세혁스러운 대본이었지. “우리 이거 뮤지컬로 만들어보자! 어떻게 완성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네 이야기니까. 우리의 늦은 청춘을 작품에 녹여내 보자!” 우리의 첫 뮤지컬은 그렇게 시작됐지. <홀연했던 사나이>의 시작은 화려했어. 2013년 창작산실 대본 공모 당선! 너와 나의 첫 작품이 리딩 무대로 올라가게 된다니 우리는 당장 정식 공연이 만들어질 것처럼 들떴지. 하지만 리딩 공연 결과는 낙선. 그 후 1년 동안 우리는 각종 공모전에 도전했고, 다음 2년은 여러 제작사의 문을 두드렸지. 하지만 그 이후의 1년은 사실상 포기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그런데 어느 날 너와 공연을 하고 있는 배우가 내게 와서 그러더라. “세혁 형은 연습실에서 맨날 <홀연했던 사나이> 음악을 들어요!” 그때 좀 오기가 생겼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내 자신이 좀 더 성장해야겠다고.

 

2018년, 간절히 바랐던 <홀연했던 사나이>의 정식 공연 날이 왔어. 첫 공연 날 바들바들 떨었던 우리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해. 마지막 곡 ‘레드카펫’이 극장에 울려 퍼질 땐 둘 다 고개를 들 수 없었지. ‘우리들의 레드카펫’이 관객분들의 레드카펫으로 옮겨진 것 같아서. 우리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 것 같았어. 세혁,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어. <홀연했던 사나이>가 무대화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나와 함께 계속해서 성장해 줘서 고맙다고. 어쩌면 성장의 시간이 아니라 버팀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홀연히 사라지지 않고 네가 늘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워.

 

2022.06.10.
홀연했던 사나이가 돌아오길 빌며, 다미로 씀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4호 2022년 7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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