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권 극장의 접근성 향상을 위한 노력
최근 장애인을 비롯한 교통 약자가 극장을 보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영미권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극장 접근성에 대한 고민이 좀 더 일찍 시작되었다. 관련 법이 우리보다 앞서 제정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공연 여건이 한국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극장 대부분이 최근 30여 년 사이에 지어졌고 관객의 연령대가 낮은 한국과 달리, 서구의 극장은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오래됐고 신체 기능 저하로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된 고령의 관객도 많다. 접근성 향상을 위한 서구 극장의 노력에서 우리는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접근성 안내원이 상주하는 웨스트엔드
영국 웨스트엔드에는 ‘접근성’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기 한참 전에 지어진 극장들이 많다. 대부분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 전에 지어진 터라, 구조 변경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접근성 개선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2010년 ‘포괄적 차별금지법(Equality Act)’이 통과되면서 장애인도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존엄하고 평등한 방식으로’ 공공시설을 이용할 권리가 명문화되었다. 또한 2019년 영국예술위원회가 접근성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하면서 문화예술계에서 ‘포용적 예술’을 위한 논의와 변화가 활발해졌다.
예술위원회의 접근성 가이드라인은 새로 건물을 짓거나 기존 건물을 개조 및 확장할 때 고려해야 하는 접근성 관련 지침을 안내한다. 이를테면 전체 좌석의 2%를 휠체어석으로 만들어야 하며, 휠체어 이용자도 다양한 위치와 가격대의 좌석 가운데 선호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이 밖에 장애인 객석, 화장실 등을 갖추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지침을 싣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지침은 접근성 향상을 위한 기본 중의 기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법적·행정적 이유로 기본 요건을 충족시키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접근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웨스트엔드의 극장들 역시 이러한 인식과 기대를 반영하여 운영되고 있다. 각각의 극장은 홈페이지를 통해 휠체어석과 장애인 화장실의 위치, 엘리베이터 설치 여부, 극장 내 계단 수 등 시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극장 주 출입구에는 대부분 문턱이 없어 휠체어를 타고도 쉽게 입장이 가능하다. 또한 많은 극장에 장애인 관객 안내를 전담하는 ‘접근성 안내원(Accessibility host)’이라는 직책의 전문 인력이 상주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관객은 안내견과 함께 객석에 들어갈 수 있고, 원한다면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극장에 안내견을 맡겨둘 수도 있다.
영국 대표 극장이자 비영리 기관인 내셔널 시어터는 접근성 관련 정보를 상세하게 제공한다. 넓은 극장 부지에서 관객이 길을 잃거나 불편을 겪지 않도록 이용하는 교통수단에 따라 택시는 어디에서 하차하면 좋은지, 주차장 위치와 극장 입구로 향하는 경사로는 어디에 있는지 등을 안내한다. 물론 휠체어 대여 서비스도 있다. “와, 이런 것까지?” 싶을 정도로 상세한 설명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극장에 어떤 종류의 문이 설치되어 있는지, 구역별로 어떤 바닥재를 썼는지에 대한 정보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는 다양한 관객을 위한 세심함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그 외 대표적인 극장으로 <메리 포핀스>가 공연 중인 프린스 에드워드 시어터는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는 ‘사회적 이야기(Social story)’ 영상을 통해 접근성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본래 자폐인 관객을 위해 기획된 영상이지만, 다양한 장애를 가진 이들이 활자 외에도 영상을 통해 극장 편의 시설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다. 눈여겨볼 만한 또 다른 사례는 소규모 연극을 주로 올리는 트라팔가 스튜디오이다. 이 극장은 홈페이지에 ‘휠체어 이용자가 극장에 도착해 객석에 앉기까지 20분 정도 소요된다’는 안내 문구를 써놓았다. 사소해 보이지만 극장에 올 때 고려할 것이 많은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유용한 정보이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관객은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실제 관극 경험을 SNS에 적극적으로 공유하며 극장이 형식적인 접근성을 확보하는 데 머무르지 않도록 환경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미국 장애인법이 바꾼 브로드웨이
브로드웨이 극장들 역시 웨스트엔드와 마찬가지로 장애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던 시절에 지어졌다.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이 극장들은 낡고 비좁아 비장애인이 이용하기에도 불편한 점이 많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에도 최근 변화가 생겼으니, 이런 전환점을 만든 것은 바로 1990년 제정된 ‘장애를 가진 미국인 법(Americans with Disability Act(이하 ADA))’이다. 1990년 3월 12일, 아직 바깥 공기가 제법 추웠던 어느 날, 60여 명의 활동가가 보행 보조기를 팽개치고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의 83개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영역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며 맨몸으로 하나둘 냉기 서린 계단을 오른 이들은 장애인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장애물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4개월 후 ADA가 통과되면서 미국의 장애인권은 눈에 띄게 신장되었다.
이전까지 적극적인 접근성 향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극장주들은 최근 20년 사이에 미국 법무부로부터 차례로 민사 소송을 당하고 극장 설비를 개선하였다. 제일 처음 제소된 것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많은 극장을 소유한 슈버트사였다.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지은 지 평균 80년이 넘은 16개 건물의 접근성이 ADA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뒤이어 2014년에는 네덜랜더사가, 2021년에는 주잠신사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운영 중인 극장을 전면 보수하였다. 미국 법무부가 직접 원고로 나서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과 서비스가 제대로 갖춰졌는지 확인하고 기준에 미달하는 시설을 상대로 소송을 치르면서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극장주들은 수만 달러에 이르는 벌금을 내고 극장을 대대적으로 손보는 것으로 법무부와 소송을 마무리 지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문제가 된 내용은 휠체어석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과 곳곳에 이동을 막는 장애 요소가 많다는 것이었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극장들은 입구의 문턱을 없애고 자동문을 설치했으며, 매표소와 매점 계산대 높이를 휠체어 이용자의 눈높이에 맞게 조정해 접근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없앴다. 또한 장애인 전용 화장실을 설치하고, 객석에는 장애인용 좌석과 핸드레일을 설치했다. 극장 홈페이지와 티켓 구매 대행 사이트 텔레차지에서 극장별 편의 시설과 서비스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슈버트사는 홈페이지를 통해 다른 브로드웨이 극장에 비해 상세한 안내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는 합리적인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장애인 전용 콜택시에 대한 정보도 있다.
ADA 규정에 따라 브로드웨이에서는 두 가지 장애인석 옵션을 제공한다. 하나는 휠체어를 고정시킬 수 있는 전용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지정 통로석(Designated aisle seat)이다. 지정 통로석의 경우 팔걸이를 움직일 수 있어 장애가 있으나 일부 보행이 가능한 이들이 휠체어에서 좌석으로 쉽게 옮겨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다. 휠체어석은 동반인 좌석을 세 개까지 함께 구매할 수 있고, 지정 통로석은 동반인 좌석을 한 개 더 구매할 수 있어 여느 관객과 마찬가지로 일행과 나란히 앉아 공연을 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위치, 다양한 가격대의 장애인석 티켓을 판매하고 있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좌석을 선택할 수 있다. 관객이 장애인 보조 동물을 동반하는 경우에는 객석에서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실제로 세인트 제임스 시어터에서 안내원으로 오래 근무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맹도견은 물론이고 맹도마(Service pony)를 동반한 관객이 다녀간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브로드웨이에서 접근성 개선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과제다. 우선 극장 구조로 인해 보수에 물리적 한계가 있다. 예컨대 <북 오브 몰몬>이 공연 중인 유진 오닐 시어터의 경우, 화장실이 지하에 위치한 데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그래서 몸이 불편한 이들은 극장 바로 옆 호텔의 장애인용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또 장애인 관객 안내를 위한 별도의 상주 인력을 확보한 극장이 없다는 것은 영국 사례와 비교해 두드러지는 한계라 할 수 있다.
영미권 사례를 살펴보면 이제 대부분의 극장이 기본적인 접근성은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를 견인한 법적·제도적 장치는 열악한 접근성이 개인이 감수해야 하는 혼자만의 불행, 당연한 불편이 아니라 기본권의 문제라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법과 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의 실질적인 접근성 향상은 앞으로 극장과 관객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모두가 극장의 접근성 향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내야 할 이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5호 2022년 8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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