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우울하고 센치해지는 계절, 가을과 겨울 사이다. 누구나 살면서 힘들거나 우울하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 바로 그때 당신을 구원해주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일년 전쯤에 아주 믿고 따르던 분에게 인간적으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어요.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사람에게 치이는 게 가장 큰 상처가 되거든요. 그때 만화책 ‘닥터 노구치’를 우연히 접했어요. 일본에 실존했던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책인데, 악조건 속에서도 명의가 되는 이야기에요. 아마도 만화광들은 잘 아는 명작일 텐데, 굉장히 심오하게 읽으며 감동을 받았어요. 책을 자주 읽지는 않지만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김정현 작가의 작품도 좋아해요. 최근에 『가족』과 『아버지』를 봤는데 세상에 외롭게 놓여있을 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을 때는 운전하면서 크게 노래를 틀어놓는데 그럴 때면 스티브 바라캇의 ‘Flying’을 듣곤 해요. 대학교 3학년 때 워크숍 공연으로 <우리읍내>를 했는데 그때 이 곡이 작품 메인곡으로 쓰여 처음 알게 되었죠. 지금도 작품 들어가면서 ‘파이팅 하자’, ‘잘하자’고 스스로에게 에너지를 북돋을 때 항상 들어요. 무엇보다 우울하고 답답할 땐 핸드폰을 꺼놓고 잠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힘들겠죠?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외국 어딘가, 이곳과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훌쩍 떠나고 싶어요.
부모님과 싸우거나, 연습이 생각만큼 되지 않을 때 저는 우울해져요. 오늘 연습에서 이만큼을 보여주고 싶은데 요만큼밖에 못 보여 줬을 때는 제 자신에게 화가 많이 나요.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네요. 요즘 또 가을이다 보니 그런 게 살짝 심해졌다고 해야 하나.(웃음) 그럴 때면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린킨 파크의 노래를 들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난 조금 외로워(I am little bit of loneliness)’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Faint’와 ‘Runaway’, 그리고 영화 <트랜스포머>의 주제곡인 ‘New Divide’에요. 그 노래를 들으면 뭔가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고 마음이 정말 후련해져요. 그분들의 록 음악을 듣는 자체가 즐거워서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족들과, 아니면 혼자서라도 영화를 보러 가요. 아주 좋아하거든요. 상상력이 풍부하게 담겼던 <트랜스포머>와 <아이언 맨>을 가장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마루 밑 아리에티>도 재밌게 봤어요. 가장 슬프게 본 영화는 <해운대>였는데 보는 내내 너무 슬펐어요. 무엇보다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가족이에요. 연습이 잘 안 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언제나 제 편에서 할 수 있다고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니까 저는 또 거기서 힘을 얻는 거죠.
사실 정말 힘들 때는 청주에 내려가서 친구들을 만나는데… (웃음) 성악을 했을 때는 힘들 면 독일 가곡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강렬하지는 않아도 서정적인 감수성이 있는 곡들에 위로를 받아요. 슬럼프가 왔을 때는 방에 혼자 틀어박혀서 음악을 틀어놓고 마음을 가라앉혔는데, 그때 제일 힘이 됐던 곡은 슈베르트의 안 디 무지크(An die Musik). 제목 자체가 ‘음악에 부쳐’라는 뜻이고, 음악에 대한 찬사를 담은 곡인데 정말 좋아요. 뭐랄까, 음악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지도록 마음을 되새길 수 있게 해주었던 노래에요. 입시 곡이기도 했고요. 입시에서 부르기에는 너무 쉬운 노래 아니냐고요? 성악과 입시에서는 보통 힘이 들어가는 오페라 아리아 한 곡, 서정적이고 음악성을 보여줄 수 있는 노래로 이런 소박한 독일 가곡 한 곡을 불러요. 오페라 곡으로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베르디 <돈 카를로>의 아리아를 불렀죠.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코믹한 복수의 노래도 아주 좋아하는데… 모차르트는 정말 사랑하죠.(그런데 베르디와 모차르트는 너무 다르지 않나요?)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정반대인 두 사람을 한꺼번에 사랑하게 돼버리고 말았어요.(웃음) 어쨌든 음악 때문에 혼이 나거나 힘이 들어도 음악 밖으로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계속 파고드는 면이 있어서….
저는 성격이 워낙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편이라 우울해도 금방 잊는 편이에요. 그런데 질문을 듣고 생각해보니 제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애니메이션을 주로 보았더라고요. 영화도 좋아하지만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해요. 픽사나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것,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등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해요. 어떤 것들은 DVD로 사서 소장해놓고 보고 또 보고 한답니다. <니모를 찾아서>는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봤어요. 하하. 지느러미 하나가 작은 니모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가 자연스럽게 시련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죠. 신파조가 아닌 감동과 재미가 있어요. <쿵푸 팬더>도 정말 좋아하고요. 떠올리다 보니 또 웃음이 나네요.
애니메이션은 억지웃음이 아니라 신선하고 창의적인 소재로 잔잔한 웃음과 감동을 줘서, 보고 나면 제 마음도 순수해지는 것 같아 좋아요. 힘든 일이 있을 당시에는 굉장히 우울하다가도 웃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져요. 제가 지금 공연 중인 <스팸어랏>도 그런 메시지를 전하잖아요. ‘인생 뭐 있나요, 웃어 봐요!’라고. 웃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들었던 일이 극복되는 걸 느껴요. 제가 좀 단순해요. 하하.
사람인 것 같아요. 사람 때문에 아프고 슬플 때도 많지만 또 다른 사람 때문에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아침에 누구와 싸워서 우울하거나 가슴 아픈 일이 있어서 ‘오늘 공연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하다가도 무대에 올라 관객들이 보내는 에너지와 박수를 받다 보면 별일이 아닌 것이 될 때가 많거든요. 사람들의 긍정적인 기운이 저를 정화시켜주는 것 같아요.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을 통해 내가 성숙해지고, 쉬지 않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거죠. <맘마미아> 지방 공연을 통해 만나는 관객들이 주는 에너지도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 마치 아이돌 스타가 된 것 같다니까요. 내년 3월까지 원 캐스트로 공연해야 하는데도 힘들기보다는 좋은 컨디션으로 그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공연할 수 있게 도와주는 가족들도 제겐 큰 힘이 된답니다.
스물아홉이면 아홉수가 있다고 하잖아요? 지난해부터 심리적으로 힘든 일들이 많았어요. 공연하던 작품이 회사 사정으로 도중에 막을 내리기도하고, 하고 싶었던 역할의 오디션에서 몇 번 떨어지니 자꾸 마음도 무거워지고 자신감이 없어지더라고요. 이런 저를 구원한 건 제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 누구보다도 한 팬이 기억에 남아요, 얼마 전, <틱틱붐> 공연이 끝나고 맨 앞줄에서 보시던 두 여자 분이 제게 오셔서 영양제를 주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언니, 동생 사이였고, 언니 분이 제 팬인데 몸이 많이 아프시대요. 너무 아파서 수술하느라 일도 못하게 되셔서, 자신감도 많이 없어졌을 때 <웨딩싱어>에서 저를 처음 보시고 알 수 없는 힘과 희망을 느끼게 되셨다고 하더라고요. 이후 <올 슉 업>, <생명의 항해> 때는 또 아프셔서 못 보셨지만, 이번 작품 할 때는 많이 나아져서 그날이 두 번째 관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자기도 왠지는 알 수 없지만 제 공연을 보시고 많이 나아 일도 다시 하게 되었다고 감사하다고 하시는데, 저야말로 감동했어요. ‘내가 이렇게 행복한 사람인데 그걸 잊고 있었구나’ 하고요. 그분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J씨, 빨리 건강해져서 제 공연 다 보러 오세요!!!”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6호 2010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