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음악과 비교해서 대중가요를 폄하할 때 가장 쉽게 나오는 이야기가 지금 당장은 귀에 잘 붙고 듣기 좋을지 몰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금방 생명력을 잃고 묻혀버릴 음악이라는 것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살짝 틀어서 생각해보면, 사실 순수 음악도 창작자들이 내놓은 대다수의 작품이 금방 잊혀지고, 극히 일부의 특출한 작품들만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는 것은 매일반이다.
보통 대중음악은 듣는 이들의 일상 가까이에 닿아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후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지난 한때를 생생하게 추억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언젠가 가수 양희은의 콘서트에 간 적이 있는데, 그녀는 ‘아침이슬’을 부르기 전에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당신 옆에는 누가 있었나요, 이 노래를 당신에게 처음 가르쳐준 사람은 누구였나요?” 그 물음과 함께 노래의 전주가 시작되는 것만으로도 객석 곳곳에서 관객들은 눈물을 훔쳤다. ‘아침이슬’은 처음 들었을 때 내 옆에 있었던 사람, 처음 내게 그 노래를 가르쳐준 그리운 사람을 떠올린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곡이었다.
흔히 오랜 시간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은 대중가요에는 한 시대의 정서와 사회상이 담겨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인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시대의 정서’라는 것이 사실은 그 노래 한 곡에 얽힌 아주 많은 사람들 저마다의 작고 사소한 사연들의 총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광화문 연가>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삼 주간 올려지는 동안 객석을 채웠던 7만여 명의 관객들 중 대부분이 그 작은 조각들을 마음에 품고 나머지 큰 그림을 맞춰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단에서는 작품에 대한 호평과 비슷하게 단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일반 관객들에게는 작품의 그 빈 곳이 오히려 자신의 사연을 채워 넣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여지가 된 신기한 공연이었다.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로 뮤지컬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업계를 떠돌고 있었다. <맘마미아>가 거둔 상업적 성공 이후, 브로드웨이에서는 존 레논, 빌리 조엘, 밥 딜런, 포시즌스의 음악으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 쏟아져 나왔다. 작곡가 품귀 현상에 시달리는 국내에도 당연히 그 영향이 있었는데 주크박스 형식이 창작뮤지컬의 당장의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7080 신드롬과 맞물려 <와이키키 브라더스>, <동물원>, <젊음의 행진>, <진짜 진짜 좋아해> 등이 줄지어 무대에 올려졌다. <형제는 용감했다>가 애초의 기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우리는 김광석의 음악으로 만들어진 주크박스 뮤지컬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은 성공을 했고, 어떤 작품은 실패했다. 분명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곡들이니 원곡의 완성도 차이가 결과를 가른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어떤 음악을 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음악의 정서와 관객이 기대하는 바를 얼마나 살려내느냐가 주크박스 뮤지컬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광화문 연가>의 메가 히트 뒤에 이 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많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중년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이영훈 음악의 힘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슈퍼스타 K2> 이문세 미션의 힘이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세시봉 신드롬을 이야기했다. 어쨌든, 노림수가 너무나 뻔한, 대중을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음원 다운로드 결제를 하고 벨소리를 받는 소비자로만 보는 오늘날의 가요판에 질린 사람들이 스스로 진정성 있는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나섰다는 것이 총평이었다.
<광화문 연가>의 서울 공연이 끝난 후, 티켓 판매와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엄청나게 팔렸다는 것이지만, 두 번째는 연령대별 판매율이 놀랍다. 주크박스 뮤지컬의 경우 일반적으로 30대 이상 관객의 비율이 높은데, <광화문 연가>는 20대 관객이 전체의 43.7%를 차지하고 있다.(19세 이하 7.4%, 30대 26.8%, 40대 16.2%, 50대 이상 5.1%. 제작사 제공.) 이영훈의 전성기에 간신히 초등학교를 다닐까 말까 했을 1980년대 초중반 출생자들이 세종문화회관 3,000석의 절반 가까이 채웠다는 뜻이다.
좋았던 지난날(Good Old Days)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문화 상품이나 왕년의 스타를 비아냥거릴 때 쓰는 ‘추억팔이’라는 말이 힘을 잃는 것은, 그 ‘지난날’에 대한 기억이 없는 다음 세대에게까지 받아들여질 때이다. 하나의 작품이 생명력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거듭해서 대상을 설득하고 매혹시킬 때만 가능하다.
<광화문 연가>는 성공한 주크박스 뮤지컬은 뮤지컬계와 가요계 양 진영에서 윈-윈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가수가 새 음반을 낸 후 한 주 만에 성패가 결정 나고 한 달 안에 활동을 마무리해야 하는 연예 산업의 속도에 모두가 나가떨어지는 신산한 시대다. 하지만 뮤지컬 무대는 그 가공할 속도전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 있다. 대중가요는 주크박스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면서 추가된 드라마와 편곡으로 기존의 팬에 더해 새로운 청자-관객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또한 뮤지컬계의 입장에서는 창작뮤지컬이 극복해야할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국적 정서’, 한국 관객들의 삶과 닿을 수 있는 지점 찾기라는 난제를 해결하는 데 산울림, 김광석, 신승훈, 이승환, 델리 스파이스의 힘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사람들이 사랑한 기존의 음악으로 뮤지컬을 만든다면, 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보다는 더 깊은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음을 결과로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 애초에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명칭에 빈정거림이 담겨 있다고 해도, 극장에 올려지는 공연을 보러 와서 동전 몇 개를 넣고 원하는 노래를 골라 듣는 차원의 결과물로 만족할 관객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2호 2011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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