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뮤지컬 전문지 <뮤지컬>의 편집장과 인터뷰를 했을 때 ‘뮤지컬 전문 배우가 아니더라도 자니스 소속이면 무대에서 어느 수준 이상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 연습생 생활을 거치면서 춤, 노래, 연기의 기본기를 탄탄하게 닦은 후에 데뷔를 하고, 스타가 된 후에는 연기와 음악 모두 장르 구분 없이 오가는 것이 자니스 출신들의 공통점이니까. 자니스 프로덕션이 내놓은 최고의 성공작 스마프가 애초에 가수로 데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래 빼고는 뭐든지 잘하는,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일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자니스 소속으로 뮤지컬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이들은 소년대와 킨키키즈의 도모토 코이치, 타키자와 히데야키, 캇툰과 칸자니8 정도가 있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자니스가 자체 제작하는 뮤지컬의 테마는 한마디로 ‘꿈을 향해 달려가는 빛나는 청춘’과 ‘Show Must Go On’ 둘 중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데, 두 가지가 겹쳐지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점은 <플레이존>, <쇼크>, <마스크>처럼 하나의 브랜드가 된 제목이 있고, 작품이 바뀔 때마다 새로 정해지는 부제목을 달고 공연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소년대의 히가시야마 노리유키가 이끌었던 <쇼크>는 2000년부터 같은 소속사 후배인 킨키키즈의 도모토 코이치가 이어받아서 10년 가까이 무대에 올리고 있다. 자니스 프로덕션에서 제작하고, 소속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뮤지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쇼크>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성공하는 것이 꿈인 일본인 청년의 파란만장한 도전기를 담은 작품인데, 쇼비즈니스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을 비현실적일 만큼 화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우리 실력을 보여주자!’,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성공하고 말 거야!’ 식의 대사를 듣다보면 언어는 다르건만 하고 있는 이야기는 참으로 익숙하구나 싶다. 뮤지컬 변방에서 꿈꾸는 중심-브로드웨이에 대한 선망은 그들이나 우리나 참 비슷하다.
<쇼크>의 주인공 도모토 코이치는 화려한 춤 뿐만 아니라 제국극장 관객석 위를 수십 번씩 날아서 회전하는 플라잉과 <퀴담>을 연상시키는 고난도 공중 기술을 소화하며 서커스와 마술로 관객들을 감탄하게 한다. 쇼 뮤지컬의 속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쇼크>는 한국 관객으로서는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고 변화무쌍하다. 킨키키즈의 열성 팬이자 뮤지컬 팬인 친구 덕분에 2000년과 2008년 버전 <쇼크>의 영상물을 볼 수 있었는데, ‘팬이 아니면 좀 괴로울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미리 듣고 마음을 다잡고 봤지만 작품은 긍정적인 의미로나 부정적인 의미로나 기대 이상이었다.
2,30년대 쇼 뮤지컬과 <퀴담> 류의 서커스, 넌버벌 퍼포먼스, 다카라즈카, 제롬 로빈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댄스 뮤지컬, 니나가와 유키오(이 노연출가는 바비칸 센터에서 열렬히 사랑받는 셰익스피어 스페셜리스트다)가 연출로 참여한 <햄릿>(극중극)이 한 뮤지컬 작품 안에서 초 단위로 바뀌는 신으로 펼쳐지는데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이렇게까지 무리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작품에 임하는 도모토 코이치의 기세랄까, 근성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강하게 느꼈다.
높이 8미터 상당의 22단의 계단에서 맨몸으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이 절찬을 받자, 다음 버전의 <쇼크>에서는 배우의 요청으로 계단수를 26개로 늘렸다. ‘사상 최고 ‘26계단 구르기’에 도전하는 도모토 코이치’라는 제목으로 공연 소개 기사가 나가는 상황은 쇼 뮤지컬 자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한국 뮤지컬 관객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다. 아마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뮤지컬이 무슨 스포츠냐는 볼멘소리부터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뮤지컬 역시 쇼 엔터테인먼트의 일부이고, 그렇다면 무대에 서는 사람은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온몸을 바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현재 제작사 자니스가 아이돌 스타를 주연으로 내세워 만든 뮤지컬 중 이 작품이 일본 공연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쇼크>는 제33회 기쿠타 가즈오(菊田一夫) 연극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쇼크>의 대본과 연출, 제작에 모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자니스의 사장 자니 기타자와는 이 작품을 가지고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쇼크>를 보기 위해 세계에서 일본으로 오도록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자랑스럽게 밝혔다. 자니스가 만든 또 다른 뮤지컬 <드림보이즈>에는 자니스의 차세대 간판스타 캇툰과 칸자니8의 멤버들이 출연했다. 도쿄 출신과 오사카 출신으로 편을 나눠 경쟁하는 복서 지망생 청년들의 이야기인데,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SM아트컴퍼니가 동방신기와 샤이니를 중심으로 뮤지컬을 만들고 멤버 10명 전원을 원 캐스트로 무대에 올리는 작품인 셈이다.
일본에서 자니스가 만드는 뮤지컬은 작품에 따라 관객 중 일반 관객과 스타의 기존 팬의 비율이 달라진다. 팬클럽 회원이어야만 티켓 구매 가능 여부를 알 수 있는 ‘추첨’에 응할 수 있는 공연도 있지만 기존 뮤지컬 마니아나 일반 관객들은 이런 작품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아이돌을 뮤지컬에 출연시키거나, 그들을 중심으로 뮤지컬을 만들면 ‘뮤지컬이 쉬워 보이냐’는 힐난을 듣는 이유가 무엇일까. 뮤지컬 관객들이 너무 배타적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아이돌 스타들이 뮤지컬 무대에 대한 존경심이나 성의를 보이지 않아서? 아니면 나라가 너무 좁고 시장이 작다보니 굴러온 돌에 대한 경계심도 높아져서?
지난해 4월 28일자 산케이 신문에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매년 여름 정기공연을 해온 뮤지컬 <플레이존>이 올해를 마지막으로 개편된다. (…) 소년대의 데뷔 이듬해부터 22년간 통산 공연 957회, 동원 관객수 138만 명 이상을 기록하며 일본 뮤지컬 역사에 발자국을 새겨온 여름의 명물 공연이 금년으로 막을 내린다.” 기사 말미에는 앞으로는 특별한 그룹을 고정적으로 정하지 않은 채로 자니스 소속 후배들이 작품을 계속 무대에 올린다는 향후 계획도 적혀 있었다. 그런데 눈이 번쩍 뜨인 것은 ‘일본에 오리지널 뮤지컬을…’이라는 <플레이존>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갈 것이라는 진지하고 엄숙한 선언이었다. ‘오리지널 뮤지컬’은 한국에서는 ‘창작뮤지컬’이라고 통용되는 단어의 일본식 표현이다. 아, 놀라워라. 자니스는 일본에 창작뮤지컬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뮤지컬을 제작해왔다는 것이다. 콜롬부스의 달걀이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같은 말들이 떠올랐다.
지난해 빅뱅의 승리와 대성이 차례로 창작뮤지컬 <소나기>와 <캣츠>에 출연을 하고, 설앤컴퍼니와 와이지엔터테인먼트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생각했던 것은 <랩퍼스 파라다이스>보다는 음악적으로 훨씬 흥미로운 창작뮤지컬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섞인 전망이었다. 와이지가 확보하고 있는 히트곡의 음원들도 매력적이지만 소속된 작곡가와 프로듀서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정도 실력의 뮤지션들이 힙합을 소재로 뮤지컬에 진지하게 도전한다면 <인 더 하이츠> 부럽지 않은 뭔가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금도 갖고 있다.
와이지엔터테인먼트가 설앤컴퍼니와 손을 잡고 뮤지컬계에 처음 올리는 작품 <샤우팅>에는 그들의 음악적 지향점보다는 스타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연예기획사로서의 정체성이 더 많이 반영된 것 같다. 하지만 수많은 청소년들이 연예인이 되기를 꿈꾸는 오늘날, 그 열망을 반영한 창작뮤지컬이 나온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주인공으로 뮤지컬 경험이 있는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캐스팅된 것 또한 문제될 일이 아니다. ‘가수가 되기를 꿈꾸다가 마침내 목표를 이루는 10대 스타’를 그들보다 잘 소화해낼 뮤지컬 배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뮤지컬 관객의 입장에서 경계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의 진심을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도모토 코이치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소년대의 뮤지컬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음악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뮤지컬보다는 환상이 중심이 된 쇼뮤지컬에 더 끌린다고 말했다. 자니스의 대표 자니 기타자와는 애초에 뮤지컬 배우 양성소를 만들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한 인물이고, 일본의 오리지널 뮤지컬이 세계에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해왔다. 일본 뮤지컬계에서 자니스의 행보를 백안시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남의 밥그릇을 노리고 들어온 옆 동네의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길을 가는 방식이 다를지언정 인정해줄 만한 같은 꿈을 꾸는 동업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뮤지컬이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승부를 벌여야 하는 산업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