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안고 자는 테디 베어와 진짜 곰의 공통점이 털이 있고 다리가 네 개라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에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까? ‘이게 다 디즈니 때문’이라고 탓하기는 쉽지만, 사실 디즈니 이전에는 이솝이 있었고, 이솝 이전에도 사람들은 알타미라 동산의 동굴에 자기들 눈에 보이는 대로 들소 떼를 그렸죠.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는 동물들이 인간에 대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그들에게 쏟아왔습니다. 집에 들인 강아지 이름 짓는 것을 유치원 다니는 외동딸에게 시키듯 하느님이 아담에게 모든 날짐승과 길짐승의 이름을 짓게 했다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그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이쯤해서 명랑한 당나귀, 약삭빠른 여우, 난폭한 고릴라, 영리한 개의 무대 위 활약상과 그들의 실제 얼굴을 비교해볼까 합니다.
스틸 컷만 봐도 에디 머피 목소리가 자동 재생되는, 슈렉의 로빈이며 왓슨 박사이자 방자인 동키는 ‘당나귀 같은’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서구인들에게 친근한 길짐승의 이미지가 제대로 반영된 익살맞은 캐릭터입니다. 당나귀 연기에 도전한 다니엘 브레이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뮤지컬 <슈렉>에서 내내 무릎을 꿇고 다녀야 하는 것은 가분수 체형과 짧고 가는 다리를 가진 파콰드 영주이고 동키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직립보행을 하지요. 애니메이션을 무대로 옮겨놓는 데 충실했을 뿐, 뮤지컬의 장르적인 특성과 원작이 만나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수준까지 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 뮤지컬 <슈렉>이다보니, 동키를 3차원 실사로 만난다는 점을 제외하면 원작에서 더해진 것도 없고, 사라진 것도 없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사실 동키(Donkey)는 말과, 말속, 당나귀종에 속하는 사역동물 당나귀를 가리키는 말로, ‘세련되지 못한 얼간이’, ‘멍청이’라는 뜻의 속어로도 쓰이는 일반명사입니다. 강아지의 이름이 ‘퍼피’이거나, 고양이의 이름이 ‘캣’인 것과 같은 무성의한 작명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동키는 타잔의 영원한 동반자 치타의 경우보다는 좀 낫습니다. ‘가자, 치타!’라는 대사로 기억되는 타잔의 수행 동물의 학명은 ‘Pan Troglodytes’, 사람, 오랑우탄, 고릴라와 함께 영장목 성성이과에 속하는 침팬지란 말이죠. 식육목 고양이과에 속하는 날렵한 맹수 치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치타는 안타깝게도 디즈니가 야심차게 내놓은 자사 애니메이션 원작 뮤지컬 <타잔>에서는 아예 삭제가 되는 이중의 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사실 치타는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소설에도 등장하지 않는 미국판 영화 <타잔> 시리즈의 오리지널 캐릭터거든요. 하지만 치타가 빠졌다고 해서 <타잔>에 사람만 나올 수는 없죠.
천애고아가 된 백인 아이를 용감하게 입양한 새끼 잃은 어미 고릴라 칼라는 우리의 주인공 밀림의 왕 타잔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아니 동물입니다. 어미 개가 새끼 호랑이에게 젖을 물렸다는 류의 해외 토픽을 꽤 자주 접하게 되는 걸로 봐서 종의 차이를 뛰어넘는 강력한 모성애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같은 영장목끼리니까요. 그런데 뮤지컬 <타잔>에서 칼라를 비롯한 고릴라들은 고릴라라기보다는 네안데르탈인 정도로 보이는 분장을 하고 나옵니다.
디즈니 사장님(토마스 슈마커)께서 말씀하시길, 뮤지컬 <타잔>은 사실 모험극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하는 사람인가’를 고민하는 정체성에 대한 극이랍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할 만큼 어린 나이에 고릴라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해도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는 존재이니 털 없는 타잔이 자신을 무리에서 동떨어진 외톨이라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타잔이 이 정도로 심각한 고민을 관객들 앞에 풀어놓으려면 당연히 대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타잔을 아끼고 사랑하는 엄마 고릴라 칼라의 모성애나, ‘저 놈은 어쨌든 인간이니 언젠가는 우리를 배신할 거야’라고 의심하는 의붓아버지 고릴라의 애증도 노래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뮤지컬의 노래에는 가사가 빠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의사소통을 멀쩡하게 잘하던 타잔이 제인에게 인간의 말을 배우는 과정을 보여주려면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창작자들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알렉산더 대왕인 양 아주 간단하게 해결을 합니다. 타잔은 그의 양부모 고릴라들과 대화할 때 미국식 영어를 쓰고, 제인에게서 영국식 영어를 배웁니다. 참으로 명쾌하죠! 미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가 재학습이 필요할 만큼 큰 차이가 있는가 하는 현실적인 의문은 접어두도록 합시다. 오히려 뮤지컬 <타잔>을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없게 하는 제작진의 수완에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로마 황제와 원로원 의원이, 청나라 대신과 환관이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진 관객들이라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과 네덜란드 버전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싶어요.
디즈니의 최근작 <인어공주>에는 당연히 인어가 등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 실제로 있는지 아닌지 정말로 알고 싶어 했던 인어는 사실 듀공을 본 뱃사람들의 착각에서 만들어진 상상 속의 존재라고 합니다. 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인어로 착각을 했나 호기심을 갖고 바다소목, 듀공과의 듀공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심란해지기 십상입니다. ‘몸 길이는 약 3m이다. 몸은 방추형이고 머리 위쪽에 콧구멍이 열려 있고 눈은 작다. 가슴지느러미처럼 생긴 앞다리는 팔꿈치부터 겉으로 나와 있다. 뒷다리는 없고 꼬리 지느러미는 수평이며 몸 빛깔은 회색인데 간혹 푸른빛을 띠고 피부는 코끼리처럼 두껍고 주름이 많다.’
마침 디즈니 신작 뮤지컬의 주인공인 빨강머리 인어공주 에리얼의 하반신도 푸른 생선이기는 하죠. 허리 아래로는 지느러미처럼 늘어뜨린 스커트가 배우의 다리를 가려주고, 엉덩이 뒤로 등푸른 물고기 꼬리가 수평으로 달려 있습니다. <인어공주>의 모든 수중생물들은 물 속을 유영하는 느낌을 내기 위해서 바퀴 달린 신발을 타고 움직이는데, 인간 사이즈의 바닷가재 세바스찬이 이끄는 ‘Under the Sea’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디즈니가 자랑하는 동물의 왕국, <라이온 킹>과 비교가 됩니다. 아름다운 지느러미를 펄럭이는 거대한 심해어가 허공을 헤엄치고, 무대 위의 수중생물들은 ‘힐리스를 신고도 저렇게 잽싼 춤을 추는구나’ 싶은 고난도 안무를 소화하건만, 어째서 온갖 동물들이 모여 서서 고개 몇 번 조아리는 것밖에 하지 않는 <라이온 킹>만큼 경이롭지 않은 걸까요. 줄리 테이머가 성공한 마법 - 인간의 신체와 몸짓에 가면과 도구가 더해져서 관객의 눈앞에서 동물의 이미지로 확장되었던 것 -과 달리, <인어공주>에서는 대부분의 동물 캐릭터가 ‘동물 옷을 입고 탈바가지를 쓴 사람’의 좀더 세련된 형태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인어공주>의 수중생물 캐릭터들은 <라이온 킹>보다는 <캣츠>에 가까운데, 사실 우리는 고양이의 습성에 대해 아는 것만큼 물고기와 바닷가재의 움직임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이 한계는 배우들에게 더 크게 작용했더군요.
군소 프로덕션의 작품을 제외하고 보면, 모든 출연자가 동물을 연기하는 뮤지컬은 <라이온 킹>과 <캣츠> 밖에 없습니다. 두 작품에서 인간이 동물을 표현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요. 1981년 웨스트엔드에서 먼저 막을 올린 <캣츠>에서 배우들은 가면이나 퍼펫 대신 분장과 털옷과 몸에 배인 고양이과 동물의 움직임에 의지해 저마다 개성이 다른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캣츠>는 T.S 엘리엇의 연작시를 가지고 만든 작품인 만큼 작품에 뚜렷한 서사가 없습니다. 극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슬픔은 인간의 희로애락과 닮았을지언정 기본적으로 고양이들의 진짜 ‘라이프 스타일’과 맞물려 있고요. 동물의 왕국판 『햄릿』인 <라이온 킹>이 사자나 기린, 코끼리의 움직임을 시적으로 표현하지만 극의 내용은 완전히 인간적인 서사를 갖고 있는 것과는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줄리 테이머는 <라이온 킹>에서 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비밀을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배우들은 자기 연기 속에 동물과 인간의 양면성을 담아내야 했다. 나라의 가면을 쓰고 의상을 입은 여배우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듯 심바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 암사자이자 젊은 여성으로서 이 작품이 가진 자부심에 상응하는 걸음걸이부터 움직임, 서 있는 자세까지 고민해야 한다. 배우가 동물의 가면을 쓰면 나머지 부분은 자신의 신체로 완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면이 보여주는 추상적 느낌은 일종의 지도나 길잡이와 같다.” 극적 재미를 위해 동물 분장을 한 사람이 춤추고 노래하고 드라마를 만들었던 작품과, 동물을 표현하는 인간의 몸이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작품의 갈림길이 어딘지 찾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