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 연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작품이라 할지라도 초연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지난해 많은 관객들의 기대 속에 첫 선을 보인 <피맛골 연가>에 대한 반응 역시 호평과 아쉬움이 섞여있었는데, 막이 열리자마자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무대 디자인은 많은 이들을 만족시켰다. 세종문화회관의 드넓은 무대를 가득 채운, 서정성이 돋보인 무대가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서숙진 무대디자이너가 들려주었다.
<피맛골 연가>에서 살구나무는 두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어주는 행매 역할을 한다. 대본을 읽고 나니 무대 위에 살구나무를 등장시키는 것이 선행해야 할 작업임이 느껴졌다. 행매 역할을 맡은 배우가 무대에 있든 없든 살구나무는 무대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막에서 살구나무는 인간으로 따지면 20~30대처럼 가장 아름답게 피어있는 모습으로, 2막에서는 꽃을 떼어내고 사람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점점 죽어가는 상태로 무대에 등장한다. 오프닝과 엔딩에서는 이미 고목이 되어 밑동만 남았고 그 밑동마저도 사라질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늘 무대 위에 존재함으로써 살구나무가 피맛골을 지키고 있음을 관객에게 주지시켰다. <피맛골 연가>는 과거의 모습이 사라진 현재에서 시작해서, 현재의 모습이 하나씩 사라지고 과거가 들어오면서 극이 시작된다. 곱게 핀 살구나무가 피맛골을 지키던 1막이 끝나고, 그 살구나무는 죽어가지만 쥐들에 의해 새로운 행매가 피어난다는 의미로 2막에 묘목의 이미지를 더했다. 피맛골의 행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우리 문화 속 정신도 이어가자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는데, 구상한 내용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잊혀져버린 살구나무가 과거 피맛골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공연이 시작된다. 작가 선생님께서는 이야기보따리가 풀리는 순간 뒤에서부터 과거가 밀려들어오는 느낌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프닝 무대 세트가 뒤에서부터 턴테이블 위를 돌아 나오는 방식으로 고안했다. 아스라이 먼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과 마을이 박제된 인형처럼 선 채 무대 깊숙한 곳으로부터 먼 길을 돌아 나왔다. 그리고 관객들 앞에 도착했을 땐 배우도 세트도 현재 그 공간에 살고 있는 듯이 피맛골의 일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세트들은 샤막처럼 비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재료를 선택했다. 이런 결정은 피맛골 서민들의 삶을 엿보는 느낌을 표현하자는 데서 시작됐다. 과거, 신혼 첫날 밤 짓궂은 이웃들은 방문의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서 방 안을 훔쳐보곤 하지 않았나. 기본적으로 세트의 모든 면이 완벽히 막히지 않고 속이 비치길 바랐다. 그래서 초가지붕과 기와 등을 만들 때 보통의 방법대로 스티로폼을 조각하는 대신에 철망에 거즈 천을 붙이고 틀을 만들어 굽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조명이 세트를 투과해서, 관객이 세트 너머의 공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길 바랐다.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도 행복했을 서민들의 삶을 훔쳐보듯이, 관객들이 무대 속을 들여다본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어느 정도 투명한 상태의 세트를 만들었다. 초가지붕은 거즈 천을 덧대고 와이어로 밧줄 느낌을 더해 입체감을 살렸는데, 이는 서민들이 천을 덧대며 옷을 기워 입던 습관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서민들의 애환이 켜켜이 쌓인 느낌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을 덧대는 작업에서도 어슴푸레나마 속이 비치도록 신경 썼고, 기둥 사이사이로 배우들의 움직임이 드러나도록 고려했다. 재료는 현대적인 것을 사용했지만, 조명이나 다른 효과들을 이용해서 전통적이고 감성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했다. 배우와 관객들이 작품 속 시대와 공간 안에 살게끔 하는 것이 무대 디자인의 가장 큰 목표였다.
2막에서 쥐들의 공간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 세계이다. 오목과 볼록이 섞여 있는 렌즈로 들여다본 듯한 이미지로 그 세계를 표현했다. 기와는 다 뚫려 있고 기둥과 창문은 모두 올록볼록 일그러뜨려서 현실의 세계가 아님을 보여주려 했다. 2막에서는 무엇보다도 쥐들이 뭘 하는 캐릭터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함이와 각이의 에피소드는 1막에서 김생과 홍랑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셈이다. 두 연인의 행매인 살구나무가 시들어 버린 때에 행매가 될 뿌리를 키우는, 즉 묘목을 키우는 공간으로서 쥐의 세계를 설정했다. 쥐들이 키우는 묘목의 도움으로 1막에서 헤어진 두 연인이 다시 만나게 된다. 엔딩에서 김생과 홍랑이 잠시나마 재회하는데, 오작교 역할을 했던 세트는 바로 콩의 묘목 이미지로 장식된 것이다. 피맛골의 살구나무는 죽어가지만 쥐들이 키우는 묘목이 새로운 행매로서 피어난다는 의미였다. 오래도록 고심해서 만든 무대였는데 관객들이 잘 이해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5호 2011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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