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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Memorial] 우리가 진정 죽은 이를 기억한다면 [NO.96]

글 |김의경(극작가) 사진제공 |이성재 2011-09-06 4,585

안현정의 부고(訃告)는 예리한 칼로 나의 살을 베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미처 아픔을 느낄 사이 없이 흥건히 배어나오는 피를 보는 듯했다. 안현정은 그야말로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 극작가였다. 그녀는 언제나 다소곳했고 조용하게 웃었다. 그러나 작업에 들어가면 무서우리만치 집중했다. 그녀는 제1회 옥랑 희곡상 당선, 제2회 차범석 희곡상 뮤지컬극본 당선, 제1회 대한민국 콘텐츠 공모전 당선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1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룬 전설이다. 현정은 무대 발표를 한 것, 완성된 희곡, 앞으로 쓸 시놉시스, 시놉시스조차 끝을 못 본 메모된 소재 등 30여 작품을 남겼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집념과 야심이 넘쳐났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3월 7일, 그녀는 결혼을 하였다. 내게 주례를 부탁해서, 나는 기꺼이 수락하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다짐을 해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주례사에서 나는 물었다. 그대들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사시겠습니까? 특히 이혼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못 되는 이 시대에, 나는 안현정과 그의 부군 이성재 군이 영원히 아끼고 사랑하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여, “이혼 따위 아니 하고 끝까지 버티기”를 성취하여 줄 것을 당부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 하고 대답하였지만, 결혼 1년 반 만에 신부 안현정은 바쁜 걸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현정은 이미 작년 9월에 첫 암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혼 후 소식이 없어 몇 번에 걸쳐, 별일 없느냐고 안부 전화를 넣었는데, 그때마다 현정은 “네, 아무 일 없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별 의심 없이 “그래, 서울 올라오면 꼭 연락해라” 하고 말았다. 현정은 내가 걱정할까봐 끝내 거짓말을 한 모양이다. 만약 마지막 침대 머리에서나마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줄 수 있었더라면, 이런 아쉬움이 덜했을까.


현정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선인장>이란 원고를 들고, 나의 극작 교실에 합류할 때였다. 2003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해 가을 우리들은 <선인장> 공연을 보았고, 원고료 1백만 원이 생겼다고 현정은 한방 쏘았다. 이듬해 봄, 서울예술단의 청탁을 받아 <크리스마스 캐롤>의 뮤지컬 극본을 쓰기로 하였을 때, 나는 현정에게 공동 작업을 제의했다. 미국의 여러 <캐롤> 본(本)과 일본의 작품들을 참고하여, 나는 인물과 장면의 설정을, 그리고 뮤직 넘버를 설계하여, 현정에게 넘겼다. 현정은 2주일이 못 되어 초고(草稿)를 가져왔다. 그러고서 몇 번의 손질이 진행되었다. 한번은 “이 대목은 이렇게 고치면 어때?” 하였는데, 그녀는 즉각 내 의견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안 돼.” 나는 말했다. “내가 하라는 것을 그대로 하지 말아줘. 내 의견을 현정이가 비판적으로 받아줘.” 이런 것들이 나와 현정의 작업 방식이 되었다.


이태 전이었나. 현정의 뮤지컬 <포에버>가 드림 시어터 컴퍼니의 프로덕션으로 막이 올랐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현정의 작품이란 점도 있었지만 그 극단의 대표이며 연출자가 현대극장 출신의 정형석 군이었으므로, 대구까지 내려가기로 하였다.


나는 원래 여자 얘기를 쓸 줄 모른다. 도대체가 픽션에 약하다. 그래서 연애 연극 잘 만드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연애 얘기 잘 쓰는 현정이가 부러웠을까? 나는 넌지시 현정이에게, 충고인지 제안인지 모를 애매한 얘기를 꺼냈다.


“현정, 앞으로는 말이야, 공부를 해야 쓸 수 있는 작품을 써 봐. 깨물면 딱 소리 나는 그런 문장, 아름답지만 슬픈 얘기, 웃어도 좋고 울어도 좋은 연애 얘기 그만 쓰고 말이야, 정신을 잃을 정도로 뭔가에 매달려 봐. 그게 아니면 안 되는 얘기, 이런 거.”


현정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잖아도 하나 준비하고 있어요. 공부하고 있어요.”


“그래? 어떤 소재(素材)지?”


“좀 더 공부하고 말씀 드릴게요. 지금은 비밀이에요.”


“그래, 기대할게.”


불행히도 그 작품은 결국 영원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현정은 <포에버> 공연 프로그램 작가의 말에서 이런 글을 썼다. 

 

죽음은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이기에,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너무나 큰 슬픔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영혼이 다시 우리를 찾아오는 이야기들을
자꾸만 만들어내는가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죽은 이를 기억하고 그 추억을
소중히 간직한다면, 그 사람은 죽은 게 아니라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게 아닐까요?
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상상의 나래를 펴보았습니다.
만약 죽은 영혼이 나를 찾아온다면?
만약 내가 그 영혼과 진정으로 소통하게 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건 아니건 간에,

그 소통은 서로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줄 것입니다.
진정한 소통은 죽음도 넘어서는 거라고 믿으니까요.

 

오늘 다시 읽어보니 옛날의 느낌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죽은 이를 기억하고 그 추억을 소중히 간직한다면, 그 사람은 죽은 게 아니라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게 아닐까요?”라는 대목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이제 현정이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현정”으로서 남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축복일 수 있다. 그래, 그대의 죽음을 축복으로 삼자.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현정, 우리들 모두는 현정이를 가슴속에 추억으로 남겨 간직하리라. 그 믿음밖에 다른 길이 없구나. 고맙게도 그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축복을 발견해주었다.

 

 

 

안현정
1977년 2월 15일 ~ 2011년 8월 4일
2006년 CJ, 킥뮤지컬 주최 <2006 창작뮤지컬 쇼케이스> 최종 선정
2007년 제13회 한국뮤지컬대상 극본상 후보 노미네이트 (<달콤한 안녕>)
현 서울연극협회 회원, 한국희곡작가협회 회원

 

* 뮤지컬
<달콤한 안녕> 작
<포에버> 작 (2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창작지원작)
<크리스마스 캐롤> 극본 (서울예술단)
<아이러버> 작 (CJ창작뮤지컬쇼케이스 최종선정)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각색
<광개토대왕> 각색
가족뮤지컬 <노틀담의 꼽추> 극본

 

* 연극
<어둠아기 빛아기> 작
<선인장> 작
<말괄량이 길들이기> 극본

 

* 동화책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호랑이도 풀을 먹을까』 (여원미디어)
『어린이를 위한 경제알림장』 (크리스타)

 

수상 경력
제 1회 옥랑 희곡상 당선 (어둠아기 빛아기)
제 2회 차범석 희곡상 뮤지컬극본부문 당선 (뮤지컬 드림가이)
제 1회 대한민국콘텐츠공모전 장려상 (뮤지컬 아이러버)
동부그룹 문예 현상 공모 시 부문 대상
문화예술진흥원장상 극작 부문 수상
스토리뱅크 창작스토리 공모 당선
시나리오작가협회 영상작가교육원 시나리오 창작상 수상
시나리오작가협회 공로상 수상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6호 2011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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