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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Essay] 성소수자가 바라보는 퀴어 뮤지컬 [No.117]

글 |코러스보이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고문, 지보이스 음악감독) 2013-07-02 5,121

성소수자가 바라보는 퀴어 뮤지컬

 

 

 

 

 

조금은 식상한 질문으로 시작하자. 성소수자들의 삶을 소재로 한 뮤지컬 또는 퀴어 코드를 담은 뮤지컬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작년 하반기에 선보인 <라카지>가 팬들과의 소통 문제로 잡음을 일으키면서도 관객몰이에 성공한 사실이나 몇 년째 꾸준히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헤드윅>, <쓰릴 미>의 예를 들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이런 작품들의 성공은 한국 사회가 다양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라며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라카지>는 ‘게이’와 ‘트랜스젠더’의 구별조차 모호했던 수십 년 전의, 그것도 외국 이야기다. 한국판 <라카지>는 성적소수자보다는 ‘성적소수자이지만 엄마’의 이야기라는 걸 강조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패 이데올로기인 ‘모성애의 신화’와 ‘가족애’를 전면에 내세웠다. <라카지>의 동성애 코드는 이성애적 가족주의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가벼운 유머 코드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또 막강한 티켓 파워를 지닌 톱 클래스 배우들과 아이돌 스타의 출연이 없었다면 그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소극장 뮤지컬인 <쓰릴 미>나 록 뮤지컬 <헤드윅>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야오이물이나 팬픽에 열광했던 마니아층을 비롯해, 꽃미남들의 노래와 연기에 열광하며 팬덤을 형성한 20~30대 여성 관객들이 없었다면 <쓰릴 미>의 성공은 가능했을까? 조승우나 오만석 등이 없었다면 <헤드윅>의 성공은 가능했을까?

 

최근 대학로에서 시작한 뮤지컬 <드랙퀸>에 대한 반응도 살펴보자. 트랜스젠더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는 이 작품, 쇼는 화려하고 배우들의 눈빛은 진솔하다. 비록 완성도는 높지 않으나 작품이 담은 메시지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하지만 <드랙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뜨겁지 않다. 주연을 맡은 하리수를 톱 클래스 배우나 가수로 보긴 어렵고, 함께 출연한 트랜스젠더 배우들은 심지어 무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리수 뮤지컬’이 ‘하리수 성형’보다도 검색 순위에서 한참 밀리는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 이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대답해보자. 성소수자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한국에서 성공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 다만 퀴어 코드를 많이 덜어내고, 뮤지컬 스타나 아이돌, 꽃미남들을 출연시킬 수 있다면.

 

 

 

 

 

 

뮤지컬계의  퀴어  파워 

미국이나 영국에서 뮤지컬계 퀴어 파워는 잘 알려져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남긴 지난 세기 최고의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은 “성공적인 뮤지컬 작곡가가 되려면 유대인이거나 동성애자여야 한다. 그리고 난 둘 다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번스타인 외에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의 연출 겸 안무가 제롬 로빈스, <코러스 라인>과 <드림걸즈> 등의 연출자 마이클 베네트, <집시>와 <스위니 토드> 등을 만든 스티븐 손드하임 등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브로드웨이 무대를 이끌어온 음악가, 연출가, 안무가, 배우들 중 성소수자들은 부지기수다. 


퀴어적 요소를 가진 뮤지컬 작품을 찾는 일 또한 어렵지 않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캣츠>는 엘리엇(T.S. Eliot)이 파리 여행 중 반했던 남자에게 바치는 시를 모티프로 만들었고, 엘튼 존이 음악을 맡은 <라이언 킹> 역시 퀴어 코드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프로듀서스>, <빅터/빅토리아>, <위키드>, <헤어스프레이>, <자나, 돈트>, <레베카> 등 퀴어 코드를 담은 뮤지컬은 무수히 많으며 심지어는 가장 가족적인 뮤지컬 중 하나인 <맘마미아>에서조차 퀴어 코드는 등장한다.  


물론 해외 뮤지컬계도 무조건적으로 퀴어 코드를 수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무대 위의 퀴어 코드에 대한 수용 과정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성장을 반영한다. 동성애자였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밥 포시의 <카바레>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냉전시대인 1966년이었고 이때 퀴어 코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 후 성소수자들에게는 노예 해방 운동과도 비견할 만한 스톤월 항쟁이 일어났다. 세월이 흘러 1998년 다시 공연된 <카바레>는 완전히 달랐다. 성소수자의 등장은 물론이거니와 퀴어 상징물 중 하나인 핑크 트라이앵글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퀴어 뮤지컬은 세상과 서로 자극하고 소통하면서 성장해왔다.

 

 

 

 


 

한국의  성소수자와  뮤지컬

이미 한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뮤지컬 시장이 되었다.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뮤지컬들이 수없이 공연되고 있고 창작뮤지컬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뮤지컬과 퀴어적인 것과의 결합만은 아직 해피 모드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국내에서 뮤지컬을 주로 향유하는 계층은 골드 미스들과 데이트족이다. 여기에 ‘영화관에 가려니 성에 안 차고, 음악회나 오페라는 지루할 것 같은’ 중년 관객들이 추가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성소수자가 아닐 것이며, 실제로 인터넷 등에 올라온 관객 평만 훑어봐도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부족하다.


물론 관객 중에는 성소수자들도 있을 것이다. 일상에 산재한 보이지 않는 차별에 힘들어하는 성소수자들에게 내가 아닌 어떤 것과의 공감, 매력적인 판타지를 가능케 하는 춤과 노래, 화려한 쇼는 강력한 최면제이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이 ‘일부러’ 퀴어 뮤지컬을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퀴어 코드가 있는 뮤지컬 공연장을 찾는 것만으로 아웃팅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소심하고 비굴하다고?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자마자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자는 항목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부 종교, 보수 집단의 극심한 반발에 시달리다 결국 법안이 철회된 곳이 한국이라는 걸 잊지 말기 바란다. 반기문 유엔 총장에 대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다가도 ‘성소수자의 차별에 반대하며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라는 그의 발언에 대해서는 모르쇠와 악플로 일관하는 곳이 한국이라는 것 또한 잊지 말기 바란다.


문화와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면서 또한 선도해야 한다. 퀴어 코드를 담은 뮤지컬도 아이돌의 팬심이나 마니아 여성층의 무조건적 지지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좀 더 당당한 도전을 보여주기 바란다. 성소수자들이 직접 참여한 <드랙퀸>처럼 성소수자들의 삶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작품들도 더 많이 제작되고 공연되어야 한다. 단순히 새롭고 자극적인 소재의 하나로만 취급하기에 성소수자의 삶은 너무나 우리와 가까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홍석천과 하리수 외에도 수많은 성소수자들은 당신들의 이웃이나 가족으로 살고 있다.


주말 저녁 <라카지>를 보며 배꼽을 잡고, <쓰릴 미>의 배우들에 열광했다가도,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서 성소수자는 사회악이고, 차별금지법은 제정되면 안 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일이 당연시되는 기이한 현상이야말로, 한국에서 문화 예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아닐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7호 2013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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