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Time Travel] 뮤지컬과 영화, 콘텐츠 교류의 역사 [NO.102]

글 |이민선 도움 | 조용신 2012-04-02 6,174

원 소스 멀티 유즈. 하나의 콘텐츠가 장르를 넘나들며 활용되는 것. 이제는 너무도 친숙한 말이 되었다. 현재 뮤지컬계에서 이 말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소재를 취하는 뮤지컬 제작 방식을 일컬을 때 사용된다. 지금까지 뮤지컬과 콘텐츠 교류를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는 장르는 영화다. 2000년대 이후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들이 대거 제작되면서 ‘무비컬’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영화보다 뮤지컬이 대중문화의 주류이던 1930년대에는 수많은 인기 뮤지컬들이 스크린에 옮겨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뮤지컬은 영화에게 인기 순위를 내어주고 오히려 그들에게서 이야기의 씨앗을 얻어오게 됐다. 1980년에 1933년 영화를 무대화해서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브로드웨이 42번가>가 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27년, 뮤지컬 영화의 등장
브로드웨이 공연장에 주옥같은 멜로디와 화려한 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뮤지컬이 올려지고 있을 때, 할리우드 영화관에서는 흑백의 소리 없는 드라마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던 1927년 10월 워너 영화관에서 <재즈 싱어>가 개봉했는데, 워너브라더스가 개발한 비타폰이라는 음향 시스템을 활용한 결과 필름에서 음악이 흘러나와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역사상 첫 번째 유성 영화가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동시 녹음해서 대사를 들려줄 수 있는 정도의 기술적 성취를 이루진 못했으므로, 여전히 드라마는 배우들의 연기와 중간 중간 삽입되는 자막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즈 싱어>에서는 내내 배경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특히 주인공이 노래하는 장면은 후시 녹음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달됐다. 더불어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내뱉은 대사는 그대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 스크린 속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했다. 초기 유성 영화는 음향 기술의 한계로 배우의 대사보다 음악의 삽입이 우선적으로 가능했다. 배우가 노래하는 장면은 드라마에 생동감을 더했다. 자연스럽게 유성 영화의 첫 모습은 뮤지컬 영화의 형식을 띠었다.


<재즈 싱어>에 이어, 대사와 노래로서 영화의 줄거리를 전개하는 뮤지컬 영화의 선구자라 말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 멜로디>가 1929년에 개봉해 큰 인기를 얻었다. 그 후 할리우드에서는 기술적 발전과 전작의 성공 요인에 따라 뮤지컬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술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당시에 가장 인기 있는 문화 상품이 뮤지컬이다 보니, 뮤지컬에서 콘텐츠나 형식을 빌려와 이제 막 태동하는 유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뮤지컬 영화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드라마와 음악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많은 프로듀서들은 이미 만들어진 뮤지컬을 스크린 속으로 집어넣는 다소 수월한 방법을 택했다.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는 비교적 탄탄한 줄거리를 갖고 있었던 <쇼 보트>를 포함하여, 브로드웨이 히트작들이 발 빠르게 영화로 제작됐다.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보았던 인기 작품들을 훨씬 더 싼 값을 치르고 영화관에서 다시 보는 것은 관객들에게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유성 영화가 나온 지 불과 3년여 만에 할리우드에는 노래와 쇼가 가득한 뮤지컬 영화들이 영화관을 가득 채웠다.

 

 

 

 

영화관에서 보는 브로드웨이 쇼
뮤지컬 영화 제작에 붐이 일면서 자연스럽게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던 창작자들은 짐을 싸서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파라마운트와 계약을 맺은 리처드 로저스와 로렌스 하트 콤비는 1930년부터 1935년까지 무려 15편의 뮤지컬 영화를 작사, 작곡했다. 안무가 버스비 버클리는 워너브라더스에서 제작한 영화 <브로드웨이 42번가>(1933)의 안무를 맡음으로써 뮤지컬 영화계 스타 감독이 되었고, 이후에는 MGM에서 수많은 뮤지컬 영화를 만들었다. 초기의 뮤지컬 영화들은 스토리 전개보다는 뮤지컬 무대에서 봄직한 쇼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무대가 아닌 영화만을 위한 쇼들이 촬영용 세트에 올라 카메라에 담겨지기도 했다. 1930년대의 뮤지컬 영화들은 제작사별로 조금씩 다른 특징을 보였는데, 파라마운트는 우아하고 세련되게, MGM은 화려하고 과장된 쇼를, RKO는 아스테어와 로저스 콤비를 내세워 춤이 돋보이는 작품을 내놓았다. 미키마우스 시리즈를 비롯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디즈니도 1937년 <백설공주>를 시작으로 장편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워너브라더스는 과장된 컨셉과 영상 기술 효과를 뽐내는 백스테이지 스토리를 주로 선보였다. 특히 버스비 버클리는 영화관에서 쇼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공연장에서 보는 뮤지컬의 한계를 뛰어 넘은 영상을 제공했다. 공연장보다 훨씬 큰 규모의 세트에 화려한 쇼를 올리고 그것을 다각도로 촬영하여, 영화에서만 가능한 시각적 효과를 구현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뮤지컬 영화 붐은 1940~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브로드웨이 쇼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기도 했으나, 뮤지컬 영화만을 위한 음악과 춤도 많이 만들어졌다. 브로드웨이가 아닌 할리우드에서 뮤지컬을 시작하는 창작자와 배우들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경제 공황으로 주춤했던 브로드웨이가 1943년 <오클라호마!>의 등장 이후 새로운 전성기를 맞기 시작하면서 창작자들과 배우들은 다시 브로드웨이로 돌아갔다. 유성 영화의 시작과 뮤지컬 영화의 인기로 호기를 누리던 할리우드는 의지할 창작자를 많이 잃었다. 더불어 영화 관객들은 비현실적인 쇼가 아닌 좀 더 사실적인 드라마를 원하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도 뮤지컬 영화는 꾸준히 제작됐지만, 영화를 위한 뮤지컬이 만들어지기보다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옮기는 데 그치게 되었다. <오클라호마!> 이후 로저스와 해머스타인 콤비의 뮤지컬들은 독점 계약을 맺은 20세기 폭스에 의해 속속 영화로 제작됐다. 1970~80년대에는 인기 뮤지컬의 영화화 비율도 급격히 감소했다. 

 

 

 

 

1980년, 무비컬 등장
프로듀서 데이빗 머릭이 1930년대에 제작된 영화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뮤지컬로 만들려고 마음먹은 데는 일련의 리바이벌 뮤지컬들의 성공 사례가 큰 몫을 했다. 프로듀서 해리 릭비가 제작한 뮤지컬 <노, 노, 나네트>(1925년 초연, 1971년 리바이벌)와 <이렌느>(1919년 초연, 1974년 리바이벌), 그리고 자신이 제작한 <베리 굿 에디>(1915년 초연, 1975년 리바이벌)는 모두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빈센트 유만이 작곡한 <노, 노, 나네트>는 1925년에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후 큰 인기를 모아, 1930년과 1940년에 두 차례에 걸쳐 영화로 제작됐다. 그 후 1971년에 브로드웨이에서 리바이벌됐는데, 초연 때와는 다른 작가가 투입되어 극본을 자유롭게 각색했다. 초연의 가사들은 다소 거친 데가 있었으나 작가 버트 쉐브러브는 1920년대를 순수함이 있던 시절로 그려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극본을 대폭 수정하고, 뮤지컬 넘버의 일부는 삭제되고 다른 곡이 추가됐다. 새로운 버전의 <노, 노, 나네트>는 1920~30년대 뮤지컬들의 리바이벌 열풍을 몰고 왔다. 1960년대 이후 젊은이들은 영화나 음악 등 다른 매체를 즐기기 시작했고, 여전히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노년층들이었다. 관객들이 그들도, 뮤지컬도 전성기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프로듀서들은 복고 아이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데이빗 머릭도 향수 아이템을 찾다가 1933년 영화를 뮤지컬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워너브라더스로부터 공연권을 얻었다. 그보다 먼저 영화를 뮤지컬화한 사례가 있었다. 1958년에 아서 프리드가 제작하여 히트친 뮤지컬 영화 <지지>가 1973년에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갔으나, 108회 상연에 그치며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다른 이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을 보고도, 데이빗 머릭은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뮤지컬화하는 데 3백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하는 과감한 도전을 했다. 그의 선택은 1930년대 브로드웨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복고 아이템이었다. 마이클 스튜어트와 마크 브램블, 두 명의 새로운 작가를 투입하여 영화의 드라마를 보강했다. 원작 영화에는 앨 더빈과 해리 워렌 콤비의 노래가 네 곡에 불과했는데, 콤비의 다른 인기곡들을 자유롭게 추가했다. 음악들은 이미 관객들에게 친숙했다. 그리고 머릭은 이전에 여러 차례 함께 작업한 적이 있는 고어 챔피언을 연출 겸 안무가로 기용했다. 화려한 쇼스타퍼 장면을 연출하는 데 그가 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이 오르면 마흔 쌍의 다리가 일사분란하게 탭댄스를 추었고, 193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어떤 쇼보다 거대하고 화려했다. 관객들은 엄청난 갈채를 보냈다. 그렇게 1980년에 첫선을 보인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대성공이었다. 윈터가든 극장에서 개막하여, 머제스틱 시어터와 세인트 제임스 시어터로 거처를 옮겨가며 3,486회 공연했다.


그 후 1952년에 나온 뮤지컬 영화 <싱잉 인 더 레인>이 뮤지컬로 제작되어, 1983년 웨스트엔드를 시작으로 1985년에는 브로드웨이에서도 개막했다.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넘어가던 시절을 그린 원작 영화를 거의 그대로 따랐다. 이 뮤지컬 역시 향수를 자극하는 아이템을 선택했고, 영화에서 들었던 일련의 주요 멜로디들을 새롭게 들려주었으며, 무대 위에 실제로 비가 쏟아져 내리는 연출을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브로드웨이 42번가>와 <싱잉 인 더 레인>은 애초에 음악과 춤이 있는 뮤지컬 영화를 원작으로 삼았으나, 이후에는 뮤지컬 형식을 띠지 않는 극영화도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1950년 영화 <선셋 블러바드>와 1977년 작 <토요일 밤의 열기>, 1980년 작 <페임> 등이 1990년대에 뮤지컬로 제작됐다. 또한 1990년대에는 <미녀와 야수>와 <라이온 킹> 같은 애니메이션들이 뮤지컬로 제작됐는데, 디즈니는 자사의 콘텐츠를 스크린에서 무대로 옮기며 원활한 원 소스 멀티 유즈로 브로드웨이의 메이저 제작사로 부상했다.

 

 

 

 

21세기, 무비컬과 뮤지컬 영화의 공존
영화를 기반으로 한 뮤지컬들은 200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2001년에 개막한 <프로듀서스>는 1968년 동명의 영화를 각색한 것으로, 그해 토니상에서 12개 부문을 휩쓸었고 흥행에서도 대성공했다. <프로듀서스>는 40년 전의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뮤지컬 제작자와 그가 만드는 극중극으로 끊임없이 웃음을 주는 뮤지컬 코미디이다. 마침 그해에 발생한 테러 사건과 맞물려, 브로드웨이 프로듀서들은 작품 선택과 제작 규모 결정에 신중해야 했고, 관객들은 무겁고 진지한 작품보다 밝고 가벼운 작품을 선호했다. <프로듀서스>의 성공 요인에 근거해, 이미 검증된 인기 원작을 활용한 뮤지컬 코미디가 새로운 제작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곧이어 2002년에는 1967년 영화를 무대로 옮긴 뮤지컬 코미디 <속속들이 모던한 밀리>가 개막했고, 1988년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신나고 건강한 내용의 <헤어스프레이>가 좋은 반응을 얻은 데서도 그 시기의 트렌드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나쁜 녀석들>(2005)과 <메리 포핀스>(2006), <웨딩 싱어>(2006), <금발이 너무해>(2007), <빌리 엘리어트>(2008), <시스터 액트>(2009), <캐치 미 이프 유 캔>(2011) 등 현재까지도 많은 무비컬들이 제작되고 있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콘텐츠를 찾아 안정적인 제작에 착수하려는 프로듀서들은 우선적으로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장르에서 창작 아이템을 얻었다. 이전에는 고전 소설이나 연극 등에서 소재를 가져왔다면, 이제는 어느 장르보다도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를 각색해서 뮤지컬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들이 많이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1960년대 이후에 보기 힘들었던 뮤지컬 영화도 다시 제작에 활개를 펴기 시작했다. 2001년에 개봉한 <물랑루즈>는 비틀즈와 스팅, 너바나 등 20세기를 풍미한 뮤지션들의 히트곡과 MTV 세대를 사로잡는 화려한 영상으로 한물간 뮤지컬 영화의 부활을 알렸다. 그해 독특한 스토리와 형식으로 인기를 얻었던 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 <헤드윅>은 적은 자본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2002년 <시카고>는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화려한 영상 미학과 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을 잘 살려, 뮤지컬 영화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를 보여주었다. <시카고>가 살린 뮤지컬 영화의 불씨는 <오페라의 유령>(2004)과 <렌트>(2005), <드림걸스>(2007), <스위니 토드>(2008), <맘마미아>(2008) 등의 제작으로 옮겨졌다. <록 오브 에이지스>와 <레 미제라블>,<스프링 어웨이크닝> 등도 곧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


현재에는 뮤지컬이 영화로, 또 영화가 뮤지컬로, 한 콘텐츠가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경계를 넘나드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잘 만든 작품을 장르에 맞게 변화시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현대 문화 산업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브로드웨이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많은 무비컬이 제작됐다. 특히 창작뮤지컬의 경우, 라이선스 뮤지컬에 비해 낮은 인지도를 만회하기 위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작품을 뮤지컬화한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한 장르에서 성공한 작품이 다른 매체에서도 빛을 발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무대와 스크린, 장소만 옮긴 재연은 까다로운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동일한 콘텐츠라 하더라도 장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에 맞는 매력을 보여주는 해석과 변용이 가해져야 한다는 게 성공적인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위해 요구되는 점이다. 그 때문에 창작자에게 이미 존재하는 작품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콘텐츠가 장르를 오가며 새로운 예술적 성취를 이루면 이는 예술가들의 창작욕을 자극한다. 그 덕에 앞으로도 뮤지컬과 영화, 그를 넘어선 또 다른 장르의 혼합과 교류의 결과물을 꾸준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2호 2012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