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의 2막에는 유리아틴으로 도피한 유리 지바고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앉아 낭독회를 하는 장면이 있다. 어린 사샤가 읽는 소설은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소절로 시작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행과 불행의 근원이 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한없이 많은 작품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작가에 의해 그려지는 거의 대부분의 가족은 누군가의 가장 힘겨운 굴레이자 극복해야할 뿌리이다. 톨스토이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기에 굳이 작품에서 다뤄질 이유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뮤지컬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한 가정과 그 불행을 삶의 동력으로 삼았던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불행
만약 뮤지컬 <서편제>를 보다가 <바람의 나라>를 떠올렸다면, 일단은 두 작품의 연출가와 무대 디자이너가 같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게 될 것이다. 무대를 넓게 비워서 사용하면서 빛과 그림자, 조명을 활용한 이미지로 많은 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기시감의 원인은 그것만은 아니다. 유봉과 동호, 그리고 무휼과 호동이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죽은 ‘어머니’가 그 부자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시대와 주제를 담고 있는 두 작품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다룬 한국의 많은 창작물에서 어머니는 가장 억압받은 무기력한 존재이거나 아니면 아예 부재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서편제>의 유봉과 동호의 관계에서는 매우 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읽히는데, 어머니에 대한 동호의 애착과 아버지를 어머니를 빼앗아간 남자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애착이 피가 섞이지 않은 누이 송화에게로 전이되는 것에서 그 흔적들이 발견된다. 고구려 대무신왕과 장터를 떠도는 소리꾼 유봉이 아버지로서 같은 욕망과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다. 유순하고 여린 왕자 호동을 강한 왕으로 키우고 싶은 아버지 무휼의 냉혹함과, 동호가 어머니를 잡아먹은 소리에 대해 치 떨리는 반감을 가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오해를 풀어주지 않고 증오심을 동력으로 삼아 아들을 소리꾼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유봉의 열망은 확실히 보통은 아니다.
아들을 큰 예술가로 만들어 보이고 싶은 아버지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유봉이 <모차르트!>의 레오폴드와도 같은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다면, 대무신왕 무휼과 호동은 <엘리자벳>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루돌프 황태자의 관계와 비견될 수 있다. 갈등의 구조가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엘리자벳>에서 엘리자벳에게 방치된 두 남자, 프란츠 요제프와 루돌프의 관계가 무휼과 호동의 관계와 더 가까워 보인다. 엄격한 도덕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였던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당대를 휩쓴 자유주의 사상의 신봉자였던 루돌프 황태자의 갈등은 매우 전형적이다. 가부장제의 극단을 보여주는 봉건제 왕국에서 절대 권력을 쥔 아버지와 유일한 합법적 계승자인 아들이 경쟁관계가 되고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나이든 아버지의 세계를 아들이 부정하고, 아버지는 젊은 아들의 반항을 억압하면서 가부장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사회 전체의 세대갈등으로 범위를 확장해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서로를 꼭 닮은 아버지와 아들은 거울에 비친 부정하고 싶은 자신을 보는듯한 반감으로 인해 반목하고, 너무 다른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미워하는 것을 보면 부자간의 반목과 애증이란 벗어날 길이 없는 그물 같다. 하지만 같은 반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에 대한 감정도 한 가지가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 쯤 되는 관계에서 그 감정이 하나로 정리해서 단언할 만한 것일 수는 없다. 그 복잡한 심리의 한 예를 <닥터 지바고>에서 볼 수 있다.
대물림이라는 무서운 운명
<닥터 지바고>에서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의 내면을 짐작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 중 하나는 ‘내 아들에게 수치는 없으리’라는 노랫말에서 찾을 수 있다. 지바고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작품 내내 그의 이름을 들은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가 된다. 건드리지 않은 사업이 없는 엄청난 재력가이자 황제에게 직접 훈장을 하사받을 만큼 명망 있는 가문이었지만 유리의 아버지 안드레이 지바고의 방탕한 생활은 왕국 같았던 지바고 집안을 풍비박산 냈다. 하지만 유리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는 그를 파멸로 이끈 코마로브스키에 대한 증오심과 불신감을 가슴 깊이 품고 있다. 자기 아버지의 몰락이 코마로브스키의 음모 때문이었다고 확신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우리 애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라는 고전적인 부모의 대사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그의 심중에 억눌려 있었던 공포와 모멸감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 ‘내 아들에게 수치는 없으리’라는 다짐이다.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라는 이름은 ‘안드레이의 아들 지바고’라는 러시아 식 작명법을 따른 것이다. 유리 지바고는 그 이름을 말하거나 불릴 때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다 간 누구의 아들인지 되새길 수 밖에 없다.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에게 마땅히 물려주어야 했을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빛바랜 이름만을 남겨준 아버지의 파멸이 사악한 변호사의 탓이었다고 책임전가를 하면서도, 아버지가 저지른 그 악덕이 자신에게서 반복될까 두려워하는 유리 지바고의 갈등은 처절하다. 이는 질서와 안정을 상징하는 인물 토냐에 대해 유리가 품고 있는 감정을 이해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토냐와 함께 하는 삶은 단지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것만이 아니라, 방탕한 실패자였던 아버지의 삶을 반복하지 않고 그 운명의 고리를 자신의 대에서 끊어내어 지바고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원래 있어야 할 밝은 세계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이름의 가족
소박한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에서 가족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피의 무게로부터 자유롭다. 이 작품은 어린 딸을 여의고 한 평생을 외롭고 살아온 지화자, 그리고 팔려가다시피 시집 간 집에서 만난 막내 동생 같은 의붓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길렀지만 결국 버림받은 박복녀가 어떻게 가족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피붙이가 아니어도 서로 보듬고 일으켜 세워가며 함께 가는 것이 가족이라는 따뜻한 이야기를 하면서 대안가족이 가짜나 모조품이 아니라 가능성과 기회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대안가족이라는 새로운 기회가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에게 가족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틀은 단순히 사회의 최소단위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있고, 그 각각의 이유는 인간의 다양한 문제들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단초인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4호 2012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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