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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카르멘 바다 [No.123]

글 |박병성 사진 |심주호 2014-02-03 4,443

나는 카르멘 또는 바다

 

아침 10시 촬영. (여배우를 아침 10시에 촬영한 것은 처음이다.) 처음 본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스럼없는 수다. 가만히 들어보면 이야기 주제는 ‘카르멘’이다. “집시니까 머리도 본인이 잘랐을 거예요. (한쪽 손에 칼을 감아쥐고 자르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이렇게” 하루 24시간을 카르멘으로 살아가는 바다는 인터뷰에서 종종 카르멘을 일인칭으로 지칭하곤 했다. 한 번 만나면 잊을 수 없는 여인 카르멘으로 분해가는 그녀는 특유의 발랄함으로 등장부터 스튜디오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이국의 태양처럼 강렬하고,카르멘보다 더 밝은 바다의 매력에 주위 사람들은 매혹됐다.

 

 

 

 


드디어 카르멘을 만나다

제작진은 ‘카르멘’ 하면 바다가 떠올랐다고 했다. 바다 스스로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넌 사회에 나가면 카르멘을 맡게 될 거야, 만약 배우를 한다면.’ 예고 시절 선생님은 마치 점괘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예고 졸업 공연에서도 그녀는 카르멘을 연기했다. 그때는 주인공만 도맡던 자신에게 조역인 카르멘을 맡겨 내심 서운했다. 그러나 이제는 카르멘이 자신에게 운명의 배역임을 안다. “어렸을 때는 빨간 옷이나 립스틱이 어울리지 않았어요. 제 열정이 강해서 터질 것 같았거든요. 이제야 빨간색이 좀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때 왜 선생님이 제게 카르멘을 시켰는지 알겠더라고요. 제 장점을 끌어낼 수 있는 역할이라는 걸 아셨던 거죠.”


지금까지 바다에게 가장 어울리는 배역은 에스메랄다였다. <노트르담 드 파리> 초연 이후 매 공연마다 에스메랄다로 무대에 섰다. ‘소녀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타고난 여성적 매력 때문에 시선을 끌었던 순수 그 자체였던 에스메랄다. 그녀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 카르멘과 같은 삶을 살았을까. 바다의 대답은 ‘노’였다. “에스메랄다와 카르멘은 너무 달라요. 집시라는 점은 같지만 시대가 달라 집시를 대하던 태도부터가 다르죠.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몸이 자라 가슴이 드러나게 되고 뛰는 데 불편하니까 치마를 찢어서 편하게 뛰는 그런 애예요. 근데 카르멘이 치마를 찢을 때는 이유가 다르죠. 남자들이 좋아하는 게 뭔 줄 알고 쥐락펴락하는 거예요.”

 

바다의 부정에도 에스메랄다의 모습에 카르멘이 겹쳐진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들은 순탄치 못한 삶을 산다. 그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에스메랄다에게도 또 다른 욕망의 손길과 유혹이 접근했을 것이다.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인들은 남들보다 두꺼운 보호막으로 겉모습을 치장한다. 때론 위악이 훌륭한 보호막이 된다. 아름다움만큼 진한 독을 품은 여자들은 그만큼 위험하고 그래서 남다른 매력을 지닌다. 카르멘의 위악을 가장한 단단한 껍질 속에 에스메랄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에스메랄다는 살아남기 위해 카르멘이 된다. 수많은 남자들의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카르멘은 집시 생활을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아름다움을 이용한 거죠. 제 생각인데 가난했던 카르멘이 처음 치장하는 데 사용한 것이 꽃이었을 거예요. 남자들이 이런 것을 좋아하는구나. 남자들을 유혹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거죠.”

 

 

 

 

생존하기 위해 아름다워야 했던 카르멘, 그래서 그녀의 아름다움엔 슬픔이 배어 있다. 커버 촬영 중 감정을 잡던 바다는 눈물을 보였다.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은 촬영에서 가장 슬픈 감정을 연기했다. “작품에는 없는 스토리지만 카르멘의 전사(前事)라고 생각한 것들이 있어요. 아버지나 가족들로부터 입은 상처, 혼자 집시로 살아가면서 얻게 된 아픔. 가르시아가 서커스단에 받아주지만 그는 너무 거친 남자였죠. 저라면 도망쳤을 텐데 그녀의 발목을 잡는 아픔이 있었을 거예요. 그녀가 정열적인 여자이지만 살아가면서 슬픔을 달래온 것도 카르멘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흔히 카르멘의 앞에는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바다는 열정적이고 강렬한 카르멘보다, 그 내면의 모습, 누구보다도 가련한 존재였던 그녀를 보여주고 싶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카르멘은 카타리나보다 더 가여운 존재예요.” 뮤지컬 <카르멘>은 소설이나 오페라하고는 좀 다르다. 인물 구성이나 관계가 조금씩 다르고, 투우사 에스카미오는 등장하지도 않으며, 서커스를 극에 깊숙이 끌어들인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라면 뮤지컬에서 카르멘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여인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여인이라는 점이다. “완전히 사랑을 소유하거나, 소유되고 싶은 판타지가 있잖아요. 원작의 카르멘은 누구보다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철저히 사랑을 밀어내게 된 거죠. 상처를 받고 나면 반대의 감정이 생기잖아요. 그러나 이번 카르멘은 다르지 않으면서 달라요. 마지막 장면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하죠. 이것은 굉장한 용기예요. 원작 카르멘은 두려움 때문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지켰다면, 이번 카르멘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해요.”

 

 

 

 

 

 

아무려나 우리는 살아간다

“어린 시절 집시처럼 살았어요. 중고등학교 때 갑자기 집안 환경이 안 좋아져서 소래포구의 염전 앞집에서 컸어요. 포구를 뛰어다니며 복숭아 따 먹고, 불 피워 고구마 구워 먹으면서 자랐죠.” 바다는 여느 연예인과는 달리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때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바다의 매력은 솔직함과 당당함에 있다. 그런데 최근 그녀에게는 솔직함과 당당함 외에 ‘여유’라는 항목이 덧붙었다.

 

예전에는 자존감에 쌓여 있던 시기도 있었다. 아이돌 1세대로서, 그리고 인기 아이돌의 리드 보컬로서 자존감이 높았다. 또 다른 한때는 자신의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에 치중했다. 사람들이 모르는 바다를 보여주려 했다. 스스로도 자연스럽지 않은데 그렇더라도 해야 되는 줄만 알았다. 지금은 달리 생각하지만 그때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을 쌓아가는 과정이 있어 지금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수들의 토너먼트 경쟁 프로그램인 <불후의 명곡>의 무대에서 바다는 이전의 그녀와 달라 보였다. “지난 10년간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었다면 <불후의 명곡> 무대는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무대를 즐겼던 것 같아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려 했다. 토너먼트 형식이었지만 결과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과 경쟁하며 연습할 때 더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이 굉장히 즐거운 일임을 경험했다.

 

“제가 집중했던 순간이 중요해요. 어울리지 않는 것을 했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잖아요.” 바다는 이제 자신이 선택한 것을 한다. 그것이 세상의 룰과 조금은 다르다면 갈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바다는 좀 더 당당해지고 여유로워졌다.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많은 계기가 쌓여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기도 하고, 무척 소중한 것을 얻기도 하고, 그런 희비의 교차들. 그런데도 저는 살아 있잖아요. 어제 울었지만, 오늘 웃고, 내일은 또 어찌 될지 모르죠. 그래서 그저 내가 나였을 때 오는 기쁨과 슬픔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러한 변화는 그의 계획에서도 드러난다. 바다는 10년 계획을 세우고 지금까지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았다. 10대에도, 20대에도, 30대에도 자신의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늘에 충실하려고 한다. 어떤 단계에 올랐으면 하는 마음보다 오늘이 미래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큰 그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40대의 그녀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는 바다가 지금처럼 밝은 사람으로 성장한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금전적으로는 굉장히 열악한 상황에 처했지만 운이 좋게도 저를 믿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서 자라니까 못할 수가 없었죠. 저는 환희에서 오는 초능력으로 자랐기 때문에 에너지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재능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경험을 나누어주고 싶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외받는 여성이나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이것 역시 어린 시절 자연을 벗 삼아 집시처럼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다의 아버지는 그녀가 수녀가 되길 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꽃동네로 봉사를 다녔고 수녀 과정도 밟았다. <시스터 액터>처럼 유쾌하고 희망을 주는 수녀가 되고 싶어 예고에 들어간 것이 인생의 방향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신앙만큼 매력적인 연극을 접했고 배우를 꿈꾸게 됐다. 지금 그녀가 꿈꾸는 미래,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은 아버지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돌고, 돌아왔을 뿐. 여러 길을 돌아 맡게 된 카르멘처럼 바다는 이제 자신의 궤도에 들어섰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3호 2013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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